•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사학
  • 설립 과정
이병희

고려 초기부터 관인이 사숙(私塾)을 세워 교육하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고 국가의 제도적 지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대부분 일시적으로 운영되다가 중단되었다.

성종 때에는 문관 사이에 가숙(家塾)을 열어 교육하는 것이 상당히 보편화된 듯하다. 989년(성종 8) 4월에 “지금부터 문관으로 10명 이하의 제자가 있는 자는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遞職)할 경우 유사가 모두 기록하여 아뢰어라. 그 실적 여부에 따라 포폄(褒貶)할 것이다.”라고49)『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성종 8년 4월. 하였다. 여기에서 문관은 제자를 키우는 일이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자감을 창설한 이후에도 중앙 귀족 자제들은 사숙에서 공부하는 일이 흔하였다.

문종 때 최충은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는 도(徒)로 발전시켰으며, 국자감을 능가하게 되었다. 최충이 처음 사숙을 만들자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그의 집과 마을에 차고 넘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학생이 많이 몰려들었다.

최충의 9재 학당이 크게 환영받자 이후 사학이 계속 설립되었는데, 개경에만도 11개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와 합하여 12도(十二徒)라 불렀다.

사학 12도는 문종 때 설립되기 시작하여 숙종 때까지는 모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숙종 때에 고려 교육에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학은 국가에서 학력을 인정한 제도권적 사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사학의 대표 격인 문헌공도에 대해서 『고려사(高麗史)』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사학(私學)은 문종 때에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 최충이 후진을 모아 교육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그의 집과 마을에 가득하였다. 마침내 9재(齋)로 나누어 (그 명칭을)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이라 하였다. 이를 일컬어 시중 최공도(侍中崔公徒)라 하였으며 양반의 자제로서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도중(徒中)에 속하여 공부하였다. 매년 여름철에는 승방을 빌려 하과(夏課)를 하였으며, 도중에서 급제하여 학문이 우수하고 재능이 많으나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택하여 교도(敎導)로 삼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학습하였다. …… 그 후부터는 무릇 과거에 나아가려는 이는 9재에 이름을 올리게 되니 이름 하여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하였다. 또 유신(儒臣)으로서 도를 세운 이가 11인이 있다.50)『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사학.

9재의 명칭은 유교 경전에서 따온 것이지만 경전과 결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9재는 상호 연계성이 있는 단계식 교육 과정이라기보다는 같은 교육을 받는 학급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