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사학
  • 변천 과정
이병희

사학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자감 학생이 대부분 폐업하였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당시 학생들은 국자감을 기피하고 사학으로 진학하였다. 사학 12도가 완성되는 숙종 때에는 이들이 국자감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체제가 정비되고 운영이 활성화되었다.

예종과 인종의 국자감 교육 강화 정책으로 사학의 위상은 크게 하락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후 사학에서 공부해도 과거에 응시하는 것 이 가능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국자감에서 반드시 3년 동안 수학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학은 일찍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헌공도는 다른 사학과 달리 무인 집권기에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장(李勝章)이나 이규보가 문헌공도에서 공부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51)김용선 편저, 「이승장(李勝章) 묘지명」, 『고려 묘지명 집성』, 2001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연보(年譜).

<표> 사학 12도의 명칭과 설립자
도의 이름  설립자 관직 급제 관계 고시관 경력
문헌공도(文憲公徒) 최충(崔沖) 문하시중(門下侍中) 1005년(목종 8) 장원  1026년(현종 17), 1035년(정종 원년) 지공거
홍문공도(弘文公徒, 熊川徒) 정배걸(鄭倍傑) 문하시중 1017년(현종 8) 장원 1047년(문종 원년) 지공거
광헌공도(匡憲公徒) 노단(盧旦) 참지정사(參知政事)   1080년(문종 34),
1085년(선종 2) 지공거
남산도(南山徒) 김상빈(金尙賓) 국자 좨주(國子祭酒)   1049년(문종 3)
국자감시 시관
서원도(西園徒) 김무체(金無滯) 복야(僕射) 1035년(정종 원년)
장원
 
문충공도(文忠公徒) 은정(殷鼎) 시랑(侍郞)    
양신공도(良愼公徒) 김의진(金義珍)
/박명보(朴明保)
평장사(平章事)
/낭중(郎中)
  1065년(문종 19) 지공거
정경공도(貞敬公徒) 황영(黃瑩) 평장사   1097년(숙종 2) 지공거
충평공도(忠平公徒) 유감(柳監)      
정헌공도(貞憲公徒) 문정(文正) 문하시중   1078년(문종 32) 지공거
서시랑도(徐侍郞徒) 서석(徐碩) 시랑    
구산도(龜山徒)        

몽고와의 전쟁으로 사학의 활동이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239년(고종 26) 강화도에서 하과(夏課)가 복구되었다. 강화 천도 후 7∼8년 만에 문헌공도 가운데 성명재에서 하과를 복구한 것이다. 이때 하과는 성명재를 열어 생도에게 교육을 실시하던 중에 시행된 것이 아니라, 성명재 출신인 김창(金敞)이 성명재란 이름을 걸고 생도를 모아 일시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52)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권7, 「기김학사창(寄金學士敞)」.

1285년(충렬왕 11)에 국왕이 구산사(龜山寺)에 행차하여 9재의 하과를 시찰하였는데, 이때 학생이 가요를 올리니 국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한 일이 있으며, 안향이 죽은 뒤 사학의 생도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다고 한다. 사학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1354년(공민왕 2)에 제사를 마치고 악차(幄次)에 물러나 하례를 받고 돌아오는데 12도의 제생(諸生)들이 각각 가요를 올렸다. 그리고 1358년(공민왕 7) 5월에 12도의 양식이 없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것을 보더라도 공민왕 때 사학이 어느 정도 기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학 12도 모두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 사학은 고려 말인 1391년(공양왕 3)까지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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