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사학
  • 학관
이병희

사학이 번창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역시 가르침을 담당한 학관이 관건이었다. 문헌공도의 경우 문종 때에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 최충이 후진을 모아 교육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사학에서 학생 지도는 기본적으로 세운 이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문헌공도의 경우 최충이 앞장서서 학생을 지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 수가 늘어남에 따라 최충이 모두 담당하여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문헌공도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불러 교도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다. 과거에 합격한 사학 출신자가 와서 후학을 지도한 것이다. 최원중(崔元中)의 경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9재의 교도가 되었다.53)이제현(李齊賢), 『역옹패설(櫟翁稗說)』 전집(前集)2.

성명재 출신으로 보이는 이담지(李湛之), 왕화(王和), 함순(咸淳)은 모두 시명(詩名)을 날리던 이들인데, 이들이 귀법사(歸法寺) 석계(石溪)에서 관동 (冠童)을 데리고 하과를 실시하였다.54)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 권중(中). 특히, 하과 출신 선배들이 하과에 와서 지도하는 일이 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졸업한 선배들이 여유가 있을 때 후배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성명재 출신인 김창은 상서직에 있으면서 몽고 침입으로 중단되었던 성명재의 하과를 강도(江都)에서 복구하여 이규보한테 칭찬을 들었다. 성명재 출신으로 고위직에 있으면서 하과를 복구하여 후학을 지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랑을 역임한 이수(李需)도 문헌공도의 조도재(造道齋) 출신인데 하과를 주관한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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