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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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희

예종·인종 때 향교는 크게 확대되었다. 중앙에서 국자감을 강화함과 아울러 지방 교육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확대됨에 따라 지방 향교도 상당히 활발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예종 때에는 지방관 중 문과 출신자에게 학사(學事)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향교 교육이 좀 더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다. 1127년(인종 5) 3월에 학교를 세워 가르치는 도를 확대하라고 하였다.59)『고려사절요』 권9, 인종 5년 3월. 이것은 아마 지방 교육을 진흥시키려고 향교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 향교를 널리 설치하고, 이미 설치된 지역도 시설이 미비하면 시설을 정비하여 교육을 확대하라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인종 때에는 여러 지방에 향교가 설치되거나 재정비되어 교육 수준도 상당히 향상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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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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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년(인종 20) 이전에 진주·부평·강화 등지에 향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이미 향교가 상당히 설치되어 운영되었음을 보여 준다. 인종 무렵에 지방 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육이 이루어져 공부하는 분위기가 상당히 고양되어 갔다.

무인 집권기에 지방 향교는 타격을 받았다. 국가에서 지방 교육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으며, 교육 시설마저 황폐해 가는 침체를 겪었다. 몽고와 전쟁으로 지방 교육은 크게 약화되어 갔다. 중앙의 국자감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실정에서 지방 향교가 역할을 다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충렬왕 때까지는 회복되지 못하다가 충선왕과 충숙왕 때 적극적인 흥학책(興學策)으로 향교 교육도 점차 회복되어 갔다. 사회가 다소 안정되자 여기저기서 향교를 중수하거나 복구하였는데, 이런 일은 모두 수령이 추진하였다. 그러나 활성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중앙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는 실정에서 향교의 활성화 여부는 수령의 열의에 달려 있었다.

공민왕 때 적극적인 흥학책이 이어지면서 향교의 교육도 다시 활기를 띠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363년(공민왕 12) 교서에서는 “근년에 간과(干戈)로 교양이 자못 해이해졌다. 지금부터 성균관·12도·동서 학당과 여러 주군(州郡)의 향교에서 엄하게 가르침을 가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그 논밭과 인구를 혹 호강(豪强)이 겸병(兼倂)한 바 있으면 관에서 이를 분변(分辨)하여 섬학용(贍學用)으로 하라.”고60)『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공민왕 12년 5월. 하였다. 공민왕이 향교의 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향교에 속한 토지와 노비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신진 사대부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방 향교의 교육도 이들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고려 말기 활발해진 향리층의 신분 상승도 향교 교육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 듯하다.

향교 교생들의 궁극적 목표는 과거였지만 급제자 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급제하지 못한 대다수 생도들에게 실시했던 교육은 교육의 보편화·대중화라는 면에서는 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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