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1장 고대와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고려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서재
이병희

서재(書齋)는 개인이 만든 교육 시설로 제도권과 관련이 없는 사립 교육 기관이어서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고 조선의 서당처럼 집안이나 마을에서 공동으로 선생을 초빙하여 운영하는 형태도 아니었다. 고을에 따라 학생의 수준이나 규모, 학관의 수준도 달랐고 서재가 없는 고을도 많았다.

서재는 교육을 담당하는 사유(師儒)의 능력이나 교육 목표 수준에 따라 교육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단순한 한자 학습에 주안점을 두는 곳도 있고 수준 높은 교육을 하는 곳도 있었을 것이다. 서재 가운데는 초보적인 교화 교육(유학 교육)에서부터 과업 교육, 더 나아가서는 성리학의 이론 탐구까지 폭넓은 영역을 모두 감당해 낼 수 있는 곳도 있었다.70)이병휴, 「여말선초의 과업(科業) 교육-서재(書齋)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67, 1975.

『고려도경』에는 “아래로는 여염집 거리에도 경관(經館) 서사(書社)가 두세 집 건너 바라보고 있어 백성의 미혼 자제들이 무리 지어 스승에게 글공부를 받았다.”고71)『고려도경』 권40, 유학(儒學). 하였다. 이 경관과 서사는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곳이었으며, 백성의 자제라는 표현에서 학생의 신분이 낮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서재가 만들어져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은 무신 정권기 이후로 보인다. 무신 정권 이후 산림이나 산사에 은둔한 문유(文儒)나 낙향한 관리들은 서재를 지어 학문을 닦으면서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개인 차원에서 집안의 학문적 전통을 이으려고 노력한 사대부 가문의 사례는 여럿 확인할 수 있다.72)송춘영, 「지방의 교육 기관」, 『한국사』 17, 국사편찬위원회, 1994, 104∼105쪽. 김구용(金九容)은 외할아버지인 민사평(閔思平)에게서, 김태현(金台鉉)은 숙부에게서, 윤택(尹澤)은 할아버지에게서, 안보(安輔)는 형에게서, 최양(崔瀁)과 박은(朴訔)은 장인에게서, 이원(李原)은 매형에게서, 정인지(鄭麟趾)는 아버지에게서 각각 수업을 받았다. 이처럼 가학(家學)의 형태로 교육을 받는 수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러한 경우가 더 흔한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려 말 격동기에는 은퇴하여 서재 교육을 담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길재(吉再)는 선산(善山)의 금오산 아래 낙향하여 본격적인 서재 교육을 대규모로 하였다.73)길재(吉再), 『야은선생언행습유(冶隱先生言行拾遺)』. 조용(趙庸)은 귀양살이 하는 곳에서 교육 활동을 전개하여 이름 난 선비와 고관(高官)을 배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배움의 제도화가 한층 진전되었다. 과거제의 시행으로 교육과 관료화가 직결되었다. 국자감은 성종 때 창설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필요한 인재를 교육시키는 제도가 운영되었다. 국자감은 문종 때 이후 사학의 발달로 위축되었다가, 예종·인종 때에 강화 정책이 추진되어 기능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인 집권기와 대몽 항쟁기를 거치면서 국자감의 역할이 축소되었으며, 개경으로 환도한 뒤 점차 기능을 회복하였다. 국자감에서는 주로 지방의 향리 출신 인물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논어』와 『효경』 등 유교 경전을 공부하게 하였다. 고려 말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 주자가 정리한 경전을 중심으로 배움이 제공되었다. 국자감에서는 100명 내외의 학생이 4∼5년 정도 수학하였다. 국자감의 학생은 국가의 의례에 참석하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사학은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에서 비롯하였는데, 설립자는 당대의 명유로서 과거 시험을 주관한 경험이 있는 이가 많았다. 사학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폐업하였으나 문헌공도는 부침을 겪으면서도 고려 후기까지 지속하였다. 사학에서는 주로 재경 관인의 자제가 공부하였으며, 배우는 내용은 국자감과 비슷하였다.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는 향교도 설치·운영하였다. 국초에는 중요한 지역부터 부분적으로 운영하였으며, 예종과 인종 때에 설치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향교에는 주로 지방 향리의 자제가 수학하였으며, 충효의 가치관과 장유유서의 질서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제도화와 관련이 없는 서재도 배움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규모나 학습 수준에서 편차가 많았는데, 개경에는 골목마다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배움을 제공하는 기관이 한층 제도화되었으며, 과거제와 연계되어 운영되었다. 국가의 교육 기관에서 수학하는 층이 이전보다 크게 확대됨으로써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관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배움은 또한 문화를 기록하고 전수하는 활동이 활발해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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