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성균관
  • 학생의 성별, 연령, 신분
  • 입학 자격과 신분
이승준

성균관에는 어떤 사람이 입학하여 공부하였을까? 성균관은 최고 교육 기관이었기 때문에 입학 조건이 매우 엄격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되어 있는데, 가장 먼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로 정원을 채우게 하였다.76)『경국대전』 권3, 예전, 생도. 생원과 진사는 ‘생진과(生進科)’라고도 하는 문과의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백성의 신분을 법적으로는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으로 나누었고, 과거 시험은 양인만이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생원이나 진사가 될 수 있는 신분은 양인 이상이어야 하며,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신분도 양인 이상이어야 하는 것이다. 1451년(문종 1)에 김종서(金宗瑞)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유생들에 대하여 “성균관은 국가의 명맥을 배양하는 곳으로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子弟)와 준수한 민(民)을 모두 가르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에서 성균관에서는 지배층의 자제뿐 아니라 일반 양민 의 자제도 입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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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입학도(王世子入學圖)
왕세자입학도(王世子入學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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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농민 같은 일반 양민은 과거 응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 성균관에 입학하는 생원과 진사는 대부분 지배층의 자제였다. 농민은 공부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과 기회가 적었을 뿐 아니라, 과거를 보기 위한 명단(錄名)을 올릴 때 사조(四祖) 안에 현관(顯官, 관직을 지낸 사람)이 없는 자는 보단자(保單子, 보증인)를 제출해야 하는데 그 보증은 반드시 지방에 사는 사람은 경재소(京在所)의 양반에게, 서울에 사는 사람은 이조나 병조의 낭관(郎官)에게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균관에 진사와 생원을 우선 입학하게 한 것은 유교 경전에 밝고 문장을 짓는 능력이 뛰어나며, 성리학적 실천 윤리에 충실한 사람을 뽑겠다는 것이다. 이는 성균관을 통해서 성리학적 통치 이념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여 백성을 교화하려는 지배층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는 생원과 진사가 적어서 정원을 채울 수 없을 때에는 다음의 조건에 따라서 입학을 허가하였다. 사학(四學)의 생도(生徒) 중에 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 오경(五經) 가운데 한 가지에 능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생원, 진사시의 초시(初試)인 향시(鄕試)나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한 자, 관리 가운데 입학하기를 원하는 자를 성균관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사학에는 10세 이상이 되어야 입학할 수 있었는데 15세가 될 때까지 공부한 후에 『소학』의 뜻을 완전히 통하면 학당(學堂)의 교관이 생도의 명단을 성균관과 예조(禮曹)에 보고하였다. 그러면 예조와 성균관의 관리가 학당에 가서 생도들이 배운 책 가운데 세 곳을 시험하여 통과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균관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도 같은 방법으로 시험하여 사학 생도를 입학시켰다. 이와 같이 사학의 생도 중에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을 ‘사학 승보(四學升補)’라고 하였다. 사학은 서울에 있는 중등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므로 사학의 생도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서울에 살고 있는 지배층 자제에 대한 배려라고도 볼 수 있다.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다른 한 가지는 ‘문음 승보(門蔭升補)’라 하여 부모가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높은 관직에 있는 경우였다. 세종 때까지는 2품 이상 관리의 자제 중에서 사학에 입학하여 15년이 지나도록 성균관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을 승보시키도록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는 부모의 음덕(蔭德)이 있는 자 중에서 15세 이상인 자는 모두 사학을 거치지 않고도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지 않고 모두 성균관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문벌(門閥) 음덕으로 들어온 자제는 대개 나이가 적고 미련하며 글의 이치를 알지 못합니다. 괴이하고 망측스러워 학풍을 해치고, 어지럽히고 시끄럽게 하며 마음에 내키면 들어오고 비위가 틀리면 나가 버리는지라 가는 자도 많고 오는 자도 끝이 없이 자주 바뀌어 한 달이 넘게 공부를 계속하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한갓 국고의 양식만 허비할 뿐이요, 대학의 모습 이 아니옵니다.77)『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8월 임인.

이에 따라 문음 자손이라도 사학에 입학하게 하여 『소학』을 배우고, 『소학』에 통하면 성균관에 입학하게 하였다. 그 뒤 『경국대전』에는 『소학』에 능통하기만 하면 사학을 거치지 않아도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입학 규정을 완화하여 법제화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하려는 생원과 진사가 부족하고, 정원이 차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성균관 입학 자격은 점차 완화되었다. 세조 때에는 문과의 향시 또는 한성시에 한 번 합격한 자와 생원·진사시의 향시 또는 한성시에 두 번 합격한 자를 입학하게 하였고, 『경국대전』에는 문과와 생원·진사시의 향시 또는 한성시에 합격한 자를 모두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현직 관료 가운데에서도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입학을 허가해 주었다.

일반 양민의 자제도 성균관에 입학할 수는 있었지만 대부분 지배층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주로 생원과 진사였다. 하지만 문음 덕으로 들어온 사람과 사학에서 올라온 유생·관료로서 입학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들에게는 일정한 수준의 학습 능력을 갖추어야만 입학을 허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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