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성균관
  • 학생의 성별, 연령, 신분
  • 유생의 성균관 거관 기피
이승준

성균관 유생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하였지만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의 수는 대부분 정원보다 적었다. 성균관 교육을 진흥하기 위하여 노력을 많이 기울인 세종 때에도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23년(세종 5) 박관(朴冠)의 상소를 보면 성균관에서 공부 해야 할 생원이나 진사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입학을 기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균관은 풍화(風化)의 근원이며, 인재가 나오는 곳으로서, 국가에서 유생의 스승을 가려서 세우고 그 공급 물자를 후하게 하였으니 인재를 기르는 길이 갖추어졌다고 이를 만하겠습니다. 그러나 생원들이 왕께서 학문을 높이는 뜻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모두 사사로이 연고가 있는 곳을 따라 본가에 물러나가 있습니다. 지금 성균관에 머물러 있는 자는 겨우 수십 명도 되지 않아 국학(國學)의 소홀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84)『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1월 병술.

이렇게 성균관 입학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균관에서 공부해야 할 생원과 진사들이 성균관에 재학하지 않고 여러 경로로 관직에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향교의 교관(敎官)은 문과에 합격한 사람을 임명하여 파견하였지만,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생원·진사들도 향교의 교도(敎導)로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생원·진사로서 향교 교도가 되어 3년 동안 교생들을 가르쳐서 교육 성과가 뛰어나면 실제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생원·진사들이 성균관에서 공부하기보다는 향교의 교도로 진출하려 한 것이다.

집권층 자제는 성균관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경로가 많았다는 것도 성균관 교육이 부실해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초에는 공신이나 고위 관리의 자손은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권층의 자제는 문음 외에도 충의위(忠義衛), 충순위(忠順衛) 등 양반 특수군에 들어가 일정한 기간을 지낸 후에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양반 특수군에 들어가 쉽게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일정한 시험을 부과하는 등 제한을 두기도 하였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집권층 자제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천거 제도(薦擧制度)가 있었다. 천거는 경학에 밝고 도덕을 겸비하였지만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은거하는 사람을 등용하기 위하여 시행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집권층의 자제나 측근의 관직 진출에 이용되었다. 천거에 따른 부정이 많아지면서 『경국대전』에는 천거된 인물이 적합하지 않으면 천거한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집권층은 문음이나 천거 등의 방법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성균관에는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재학한 것이다. 1525년(중종 20) 석강(夕講)에서 왕이 “성균관에 드나드는 사람이 모두 외방(外方)의 선비이고, 재상(宰相)의 자제는 전혀 가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재상도 마땅히 자제들이 성균관에 나아가 학업에 힘쓰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85)『중종실록』 권55, 중종 20년 10월 병오. 즉, 집권층의 자제가 성균관에서 공부하기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이 성균관 교육을 부실하게 하는 원인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유생이 성균관에서 공부하지 않으려 한 이유 가운데 다른 하나는 성균관의 교육 과정과 과거 시험 과목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신진 사대부들은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성균관의 교육 과정은 경학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과거 시험의 과목은 대체로 제술이 중시되었다. 특히, 문과 초장의 과목은 강경으로 하기도 하고, 제술로 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유생의 학습에 민감하게 영향을 주었다. 조선 건국 초에는 정도전(鄭道傳)의 주장으로 문과 초장에서 강경을 시험하였으나 태종 때부터는 변계량의 건의에 따라 제술을 시험하였다. 그 뒤 논란을 거듭하여 결국 성종 때 『경국대전』에는 문과 초시의 초장에는 제술을 시행하고, 문과 복시의 초장에는 강경을 시험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같이 과거 시험 과목이 성균관의 교육 과정과 달랐기 때문에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스승을 찾아 공부하려 한 것이다.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하기 위하여 과거 응시 자격에 성균관 출석 점수인 원점제(圓點制)를 도입하였으나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원점에 예외 규정이 많았을 뿐 아니라 원점제를 관시, 알성시 등 일부 과거에만 적용하였기 때문에 원점을 얻지 않아도 과거에 응시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별시(別試)를 갑자기 시행하여 평소에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시험 볼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별시를 시행하여 성균관에 재학하는 유생들을 확보하려는 조치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이익으로써 유생을 유인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별시를 자주 시행하면 오히려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뺏는다는 비판도 제기되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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