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1. 성균관
  • 스승과의 관계
  • 교관의 자격과 임명
이승준

성균관의 교관은 유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들을 지도하 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러므로 성균관 교육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훌륭한 교관을 임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1445년(세종 27)에 성균관 유생들이 “국가의 다스림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에 달려 있고, 인재를 배출하는 것은 스승의 도(道)가 바로 서는 것에 관계된다.”라고 하며 당시 대사성(大司成)이던 김반(金泮)의 임기를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즉, 성균관의 교관은 장차 관료가 될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중요한 직책이기 때문에 다른 관리의 임용보다 우선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1392년(태조 원년)에 성균관의 교관 직제를 제정하였는데, 이때에는 고려 말의 성균관 직제를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뒤 1401년(태종 원년) 관제 개편 때 성균관 좨주(祭酒)를 사성(司成)으로 바꾸는 등 성균관 관제도 일부 바꾸었다. 세종 때에는 교관의 수를 대폭 늘렸으며, 대사성을 종3품 당하관에서 정3품 당상관으로 올려서 임명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교관의 수가 약간 줄기도 하였지만, 다른 직책이 있는 관리가 대사성을 겸하던 것을 폐지하고 대사성과 사성을 독립된 직책으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종 때에는 『경국대전』에 성균관 교관의 직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즉, 성균관의 교관은 지사(知事) 1명, 동지사(同知事) 2명, 대사성 1명, 사성 2명, 사예(司藝) 3명, 직강(直講) 4명, 전부(典簿) 13명, 박사(博士) 3명, 학정(學正) 3명, 학록(學錄) 3명, 학유(學諭) 3명 등 모두 38명이었다.102)『경국대전』 권1, 이전, 성균관.

그러면 성균관의 교관이 되기 위한 자격 기준은 어떤 것이었을까? 성균관 교육의 책임자였던 대사성이 갖추어야 할 자질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가장 먼저 학문적 능력, 특히 경학에 능통해야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을 경학에 밝고 성리학적 이념을 내면화한 관료로 양성하기 위하여 교육하는 것이 교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1451년(문종 원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예문관 제학(提學)이던 윤상(尹祥)의 복직을 건의하였을 때 사관(史官)이 쓴 글에 “윤상은 학문이 정미하고 이학(理學)을 잘하였는데, 특히 『주역』에 능통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경학으로 소문이 나서 오래 성균관에 임명되어 여러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조금도 권태로워하는 빛이 없어 유생들 가운데 뜻을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관은 학문적 능력이 뛰어나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학식을 갖추었다고 해서 성균관의 교관으로 임명될 수는 없었다. 성균관의 교관은 유생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어질고 덕이 있어야 하였다. 또한, 교관은 어느 정도의 연륜, 즉 나이가 들어야 할 수 있었다. 교관이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해야만 유생들이 잘 따르고 교육적으로도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학을 공부하던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오륜(五倫)의 하나인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1474년(성종 5)에 공신 한명회(韓明澮)의 조카 한언(韓堰)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성종이 한언의 학문이 뛰어나다고 여겨 그를 대사성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사헌부를 비롯한 대간(臺諫)에서 “어찌 관직 경험이 적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스승들의 우두머리인 대사성을 맡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성종은 한언의 임명을 철회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성균관 교관은 신분이나 품계(品階)가 높아도 어느 정도 관직 생활을 경험하고 연륜이 있어야만 임명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성균관에서 교관의 임무가 중요하였기 때문에 교관 임명은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성균관 교관을 뽑기 전에 먼저 경서에 밝고 덕망이 높아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추천 받아 사유록(師儒錄)을 작성하게 하였다. 즉, 사유록은 교관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사유록은 의정부, 6조의 당상관들이 서로 의논하여 스승의 직책을 맡길 만한 사람을 선정하여 작성하였다. 1439년(세종 21)에는 사헌부에서 “교관으로 임명되었던 김숙자(金叔滋)는 과거에 급제한 후에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렸다.”는 이유로 사유록에서 삭제하도록 건의하여 세종이 김숙자를 사유록 에서 삭제하였다. 이처럼 사유록 작성과 관리는 비교적 엄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 대사성은 대부분 과거 문과 출신자로서 사유록에 올라 있던 사람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이조(吏曹)에서 사유록에 있는 사람 가운데 대사성에 적합한 세 사람을 뽑아 국왕에게 올리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국왕이 임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관직에 일정한 임기가 정해져 있었다. 서울에 근무하는 경관직(京官職)의 임기는 6품 이상이 900일이었고, 7품 이하가 450일이었다. 성균관의 교관도 직책에 따라 임기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성균관 교관은 정해진 임기와는 관계없이 가능하면 오래 근무하도록 하는 ‘구임제(久任制)’의 적용을 받았다. 특히, 성균관 교육의 책임자인 대사성은 유능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을 오래 있게 하여 훌륭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배려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대사성 가운데 스승의 표본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던 윤상(尹祥)은 15년 동안 대사성으로 있어 당시 관리의 대부분이 윤상의 제자라고 할 정도였다. 『경국대전』에는 성균관의 직강(直講) 이상 1명은 구임(久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성균관 교관을 구임하도록 한 것도 훌륭한 교관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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