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향교
  • 향교의 교생 자치 조직
  • 교임의 임무와 권한
이승준

향교에서 교생들이 선출한 교임의 역할은 매우 컸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교관이나 수령보다 교임이 독자적으로 향교를 운영하기도 하였 다. 교임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봄과 가을에 거행되는 석전제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문묘에 분향할 때 제관이 되는 일이었다. 석전제는 수령을 비롯하여 향촌(鄕村)의 유지들이 모두 모이는 중요한 행사였다. 교임은 석전제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또한 제관으로 당일의 제례를 주관하였다. 제례에 필요한 물품은 대부분 관아에서 조달하였다. 하지만 교임이 제례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양민을 침탈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1714년(숙종 40)에는 순천 향교에서 교임이 석전제에 쓸 물품을 독촉하던 중에 면임(面任)의 아버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115)『숙종실록』 권55, 숙종 40년 7월 경술.

또한, 교임이 뇌물을 받고 양민을 석전제에 집사로 참여시키는 일도 있었다. 석전에 집사로 참여한 양민은 교임에게 증명서를 받아 군역을 면제 받는 데 활용한 것이다.

교임의 다른 임무는 향교의 재정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향교 재정의 출납은 주로 장의가 담당하였다. 국가에서 세운 학교인 향교의 재정은 국가에서 지급한 학전과 노비를 기반으로 하였다. 하지만 학전과 노비만으로 향교를 운영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교임은 양민에게 원납전(願納錢)을 받아 사용하였다. 1781년(정조 5) 죽산 지방 유생의 상소는 양민에게 원납전을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어떠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관청에서 공급하는 물품이 문묘의 제사를 받들고 교생들을 공궤(供饋)하기에 충분한데도, 이른바 재임(齋任)이란 자가 향교의 서까래 하나 기와 하나라도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장황하게 큰일이 난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원납(願納)을 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합니다. 이른바 원납이란 것은 백성이 돈 20냥을 스스로 바치고 일생 동안 역을 면제받는 것을 말합니다. 1년에 두 차례 시행하는데, 원납을 받을 때 원하는 자가 거의 없으며 어쩌다가 겨우 하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향교의 노비들을 보내어 집에 송아지 한 마리라도 있으면 부유한 양민이라고 말하면서 집안이 파산되어도 강제로 받아 내고야 맙니다. 간혹 관청에서 금지하거나 향당(鄕黨)에서 시비하는 경우가 있으면 향회(鄕會)와 관통(關通) 등의 이야기를 가지고 협박하는가 하면 불과 수십 냥이면 쉽사리 수리할 일을 반드시 수백 냥을 청하고 있습니다. 이런 재물은 관가에서 내어 놓은 것도 아니고 또 향교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모두 원납에서 나오는 것이니, 하소연할 데 없는 지친 백성이 어떻게 지탱하여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116)『정조실록』 권12, 정조 5년 11월 정묘.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양민이 향교에 입학하는 수가 늘면서 교생 정원 외에 교생과 보인(保人)을 받아 주고 대가로 돈과 재물을 받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교임은 향교 건물을 유지하고 수리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며, 향교 도서를 관리하고 보관하는 일도 하였다.

향교는 향촌의 유생들이 모여서 정치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모아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는 향촌의 중심지였다. 교임은 이러한 향교의 운영자이며 교생의 대표였기 때문에 향촌에서의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 1714년(숙종 40)에는 태인 향교의 교임이 문묘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간 사람을 잡아들여 처벌했는데 3일 후에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향교의 교임이 관청에서 임명한 직책이며, 문묘 앞에서 말을 탄 죄를 다스리는 것은 사사로운 처벌이 아니기 때문에 교임의 죄를 묻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이로써 국가에서도 향교의 교임을 관임(官任)으로 인정하고 대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령은 군현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향교 교임의 협조를 구하기도 하였으며, 교임은 효자, 열녀 등 풍속의 교화에 관련된 사람들을 포상하도록 관청에 추천하기도 하였다.

교임이 자신의 신분이나 향촌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원 유생들이 평상시에 고을의 양민으로 혹 싫어하고 분하게 여긴 자가 있으면 꼭 제향하기 위하여 문묘에 들어설 때에 향교의 노비들을 보내 붙잡아 들여 낭자하게 때리기를 마치 형벌을 집행하는 관리같이 한다.117)『교원교폐절목』: 윤희면, 앞의 책, 205쪽 재인용.

향교 관리는 수령이 책임졌지만 교임이 실질적으로 향교를 운영하였다. 교임은 이와 같은 권한을 이용하여 문묘 제향 같은 의례를 할 때에 백성을 침탈하는 행위를 하기도 한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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