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향교
  • 향교의 사회 교육 활동
  • 유교 의례를 통한 교화 활동
이승준

향교에서는 교육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유교 이념을 보급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유교 의식을 함으로써 향촌의 백성을 간접적으로 교화하기도 하였다. 향교에서 이루어지는 유교 의식은 석전제를 비롯한 문묘 제향,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양로연(養老宴) 등이 있었다.

향교에 있는 문묘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묘는 유교의 상징이었다. 조선의 모든 향교는 문묘가 교육 공간과 독립되어 있었다. 군현의 수령은 매년 정기적으로 향교의 문묘 제향에 참석해야 하였고, 군현에 부임할 때나 떠날 때에도 문묘에 참배하였다. 또한,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문묘에 들러 예를 갖추는 것이 관례였다. 향교에는 문묘가 있기 때문에 그 앞에는 하마비를 세워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유교의 근원을 상징하는 문묘는 신성하고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문묘에 제향하는 행사를 해서 향촌의 백성을 교화하려 하였다.

백성은 배부르고 따뜻한 것만 귀중한 줄 알고 예의와 충효가 배부르고 따뜻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교도하지 않으면 옳지 못한 것이다. 이에 성현을 문묘에서 제사하는 까닭은 문묘에서 예악과 교화가 나오기 때문이다.125)『성종실록』 권83, 성종 8년 8월 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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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제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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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에 제향하는 것은 백성에게 유교의 주요 덕목인 예의와 충효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향교의 문묘에 지내는 제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는 석전제였다. 석전은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이다. 성균관이나 향교 같은 학교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기리고,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지내는 제례였다. 석전제는 매년 두 차례,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거행하였다. 제례는 헌관과 집사가 주관하였다. 헌관은 선현에게 잔을 올리는 제관인데,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등이 있었다. 초헌관은 군현의 수령이 담당하였으며, 종헌관은 교임의 대표가 맡았고, 아헌관은 동재의 유생이나 군현의 유력한 양반이 맡았다. 집사는 헌관을 도와 제례를 진행하는 하급 제관인데, 대개 서재 교생이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의 교육 기능이 약해지면서 문묘 제향 기능이 강조 되었다. 향교의 제향 기능이 강화되었던 것은 향촌의 양반들이 문묘 제향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적 신분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석전제에는 향촌의 양반 유생들이 대부분 참석하였으며, 석전제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가 향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는 것이기도 하였다. 석전제가 끝난 뒤에는 지방 유림들이 향촌 사회의 여론을 수렴하여 지방관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교임을 선출하는 등 행사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양반이 된 신향들은 석전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였고, 더 나아가 석전제의 제관으로 임명되려고까지 하였다.

1840년(헌종 6)에 영해부(寧海府)에서 석전제의 제관으로 참석할 수 없었던 서얼들이 수령에게 부탁하여 제관에 임명받으려 한 사건도 있었다.126)장영민, 「1840년 영해 향전과 그 배경에 대한 소고」, 『충남사학』 2, 1987.

그렇지만 구향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 유생들이 강하게 거부하여 향전으로 확대되었다. 양측에서 모두 탄원하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수령, 구향, 신향 모두 처벌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향교의 제향 기능이 강조되면서 석전제를 둘러싼 양반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향전으로 발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석전제 외에 문묘에 배향하는 행사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행하는 삭망분향제(朔望焚香祭), 향교 건물을 수리하기 위하여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 행하는 이안제(移安祭)와 돌아올 때 행하는 환안제(還安祭), 문묘가 큰 해를 입었을 때 행하는 위안제(慰安祭) 등이 있었다.

향교에서는 문묘 제례 이외에도 향음주례, 향사례, 양로연 등의 유교 의례를 행하였다. 향음주례는 매년 10월에 향촌의 연로하고 덕행이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향촌 의례였다. 향음주례에서는 특히 예의와 질서를 엄숙히 지키게 하여 예법을 익히는 자리가 되게 하였다. 이때 인근의 선비들과 교생, 향촌의 백성이 모여 이 모습을 구경하고 함께 잔치를 하였다. 따라서 향음주례는 향촌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예의와 질서를 지키게 함으로써 유교 이념을 백성에게 뿌리내리게 하려는 사회 교화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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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음주례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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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사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유교의 육례(六禮) 가운데 하나인 활쏘기를 행하는 것이었다. 1483년(성종 14)에 김종직(金宗直)이 올린 글을 보면 향사례가 백성의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이 수령으로 있을 때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베풀어 효도하는 자를 첫째로 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다음으로 하고, 행실이 좋지 않은 자는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 고을의 사람들이 효를 행하려 하고, 교화되어 부끄럽게 여기고 행실을 고쳐서 풍화(風化)에 도움이 있었습니다.127)『성종실록』 권157, 성종 14년 8월 임인.

효도를 하거나 덕행이 있는 사람들을 참석시켰기 때문에 백성이 그들을 본받아 행실이 교화되었다는 것이다.

양로연은 군현의 수령들이 주관하여 향교에 지역 노인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푼 것이다. 즉, 양로연은 향촌의 백성에게 유교 윤리의 기본이 되는 장유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시키고, 경로를 권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향교에서는 향사례, 향음주례, 양로연 등의 향촌 의례를 행하여 백성 에게 예법을 가르치며 풍속을 교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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