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2. 향교
  • 향교의 사회 교육 활동
  • 향촌의 여론 수렴
이승준

조선 후기에 향교의 교육 기능이 약해지면서 향촌의 양반들은 교생이 되는 것을 기피하였다. 향촌의 양반들은 향교 동재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을 따로 작성하여 서재 교생들과 구별하였다. 하지만 향교에서 행하는 석전제 같은 향촌 의례를 주관하면서 여전히 향교를 이용해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양반들은 향교에 모여 향교의 교육 활동이나 문묘 제향에 대한 문제를 의논할 뿐 아니라 향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를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향촌 사회의 여론을 수렴하여 지방관에게 전달하거나 중앙에 올려 정책에 반영하려는 활동까지 펼쳤다.

향교를 통한 양반 유생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통문(通文)이었다. 향촌의 유생들은 통문을 중앙의 성균관이나 다른 지역의 향교, 서원에 연락할 때에 활용하였다. 즉, 유생들은 향교에 모여 여론을 수렴하고 그것을 통문으로 작성하여 다른 지역의 유생들에게 알림으로써 여론을 확산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향촌의 유생들이 통문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문제는 상소문을 작성하여 올리거나 직접 상경하여 상소하기도 하였다.

향촌의 유생들이 통문으로 해결하려 한 문제는 사문의리(斯文義理)라 하여 주로 유교의 이념과 관계된 일이었는데 대개 이단으로 취급하던 불교, 도교 등을 배척하거나 성현에 대한 문묘 배향에 관계된 일 등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조정의 대신이나 군현의 수령 등 관료에 대한 비판이나 국정에 대한 시비 등의 문제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조정이나 지방관들은 유교 이념과 관련된 일에 대한 통문은 대부분 선비들의 공론이라 하여 관대하게 처리하였다. 그러나 유생들이 관료에 대한 비판이나 국정에 관한 시비를 통 문으로 관여하려고 할 때는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1820년(순조 20)에는 영양(英陽) 수령이던 조석륜(曹錫倫)이 서원을 잘못 철거한 일로 파직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조에서 조석륜을 다시 천거하자 유생들이 이조 판서를 비판하는 통문을 성균관에 보냈다. 이에 국왕은 유생들의 통문을 엄격하게 규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근년 이래로 선비의 버릇을 잠자코 살펴보니, 점점 예전과 같지 않아 탄식이 나오는데, 이른바 통문이라는 것은 더욱더 부끄럽고 한심스럽다. …… 조정 관원의 잘못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경고할 일이지 유생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 …… 전에 이 같은 통문으로 대신이 자리에 있기를 불안해하고 전형(銓衡)의 신하가 낭패를 당하여 떠났는데 …… 그러고 보면 몇 명의 불량배들을 모집하여 유생의 이름을 거짓 의탁하여 통문을 발송해도 욕망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뒤로는 어떤 통문이든 막론하고 조정 신하의 시비를 간여할 경우에는 모두 법을 어긴 율로 시행할 것이다.128)『순조실록』 권23, 순조 20년 5월 정축.

통문은 유생들이 유회를 소집하여 작성하는데, 정기적인 유회는 봄과 가을에 열리는 석전제가 끝난 후에 열렸다. 하지만 긴급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통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임시 유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유생들이 통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유회를 소집하는 것을 규제하였다. 유교 이념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유회를 소집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유회를 소집하려면 관청의 허가를 받게 하였다. 그렇지만 향교는 향촌의 양반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향교에 모여 향촌의 교화에서부터 국정에 대한 일까지 여론을 모으는 활동을 규제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 향교는 향촌의 여론을 수렴하는 공론의 장소이며 향촌 자치 기구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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