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
  • 서당
  • 서당의 설립과 변천
임하영

서당(書堂)은 글방, 서재(書齋), 서방(書房), 책방(冊房)이라고도 불렸으며, 대부분 소규모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설립할 수 있어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퍼져 있던 교육 기관이다. 서당의 기원을 고구려의 경당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에도 서당 형태의 교육 기관은 존재하였으나 조선 전기까지 초등 교육은 가정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이들이 추진한 향약(鄕約) 보급 운동과 시기를 같이한다. 당시 서당 설립의 명분은 유학적 질서를 향촌 사회에 정착하는 것이었다.

16세기 후반에 서원이 성립되어 중등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점차 서당은 초등 수준의 교육 과정을 담당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서당은 처음에는 서원에 부속된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17세기부터 서원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기에 들어 동성(同姓) 마을이 서당 설립의 가장 중요한 주도 세력이 되었으며, 소규모 자산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서당계(書堂契)가 고안되어 경제적으로 여 유가 없던 평민층에게도 교육 기회가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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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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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서당의 실태에 대해 “한 고을에 수십 개의 마을이 있는데, 대략 4∼5개의 마을에는 반드시 서재가 하나 있다.”고 말하였다.132)정약용, 『목민심서』, 예전, 과예. 또한, 조선 후기에 전국의 동·리의 수와 거의 같은 3만 가까운 향촌 서당이 있었다고 하는 일본 통계를 보더라도 서당이 꾸준히 확산되어 고을마다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구(金九) 선생이 『백범 일지』에 쓴 어린 시절 서당 공부 모습을 보면서 조선 후기 서당의 설립과 운영 모습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자.

내 나이 열두 살(1887)이었다. 나는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면 남들이 무시할 수 없는 양반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은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 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며 주저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하나 만드셨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 주기로 하고 청수리 이 생원을 선생으로 모셔 왔다. 그 분은 양반이지만 글이 넉넉하지 못하여 ‘양반의 선생’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 같은 ‘상놈의 선생’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집은 사랑에 공부방을 열고 선생님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집에서 석 달 지낸 뒤 서당은 인근 산동 신존위 사랑으로 옮겨 갔다. 나는 집에서 서당까지, 서당에서 집까지 오가며 끊임없이 글을 외웠다. 동무들 가운데에서 나보다 수준이 높은 자도 있었지만, 배운 것을 외우는 시험에서는 늘 내가 최우등이었다.

반년이 되지 않아 신존위 부친과 선생 사이에 반목이 생겨 결국 선생님을 내보내게 되었다. 겉으로는 그 선생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은 자기 손자는 머리가 나빠 공부를 못하는 데 비해 나의 학문이 날로 발전하는 것을 시기한 것이었다. 일전에 매달 보는 시험(월강)을 앞두고 선생님은 나에게 은밀하게 “네가 늘 우등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못 외는 것처럼 모른다고 대답하여라.”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내가 선생님 부탁대로 하였더니 그 날은 신존위 아들이 1등하였다고 닭 잡고 술상 차려 잘 먹었다. 그런데도 결국 그 선생은 해고되었다.

얼마 후 다시 그와 같은 ‘돌림선생’을 모셔와 계속 공부를 하였는데, 내 나이 열넷이나 되고 보니 만나는 선생마다 대개 고루하여 아무 선생은 ‘벼 열 섬짜리’, 아무 선생은 ‘다섯 섬짜리’ 등 수강료의 다소로 학력을 짐작하게 되었다. 이때 아버님은 종종 나에게 이런 훈계를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 문서에나 주력하여라.” 그래서 나는 토지 문서, 소장, 제축문, 혼서, 편지글 등을 틈틈이 연습하여 무식한 우리 집안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나는 어찌하든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가정이 빈한하여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되지 못하여 아버님은 무척 고민하셨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 10리 되는 학명동에 사는 정문재씨는 상민이었지 만 지방 굴지의 선비였는데 한쪽에서 서당을 열어 아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아버님이 정씨에게 부탁하셔서 나는 수강료 없이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시를 짓는 데는 초보적인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를 익혔고, 공부는 한·당시와 대학, 통감을 배웠으며, 글자 연습은 분판만 사용하였다.133)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 일지』, 돌베개, 1997, 30∼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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