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3장 근대의 배움과 가르침
  • 4. 통감부의 교육 정책
위영

고종은 열강의 개입이 약해지자 왕권 강화를 시도하지만, 상황은 주변 정세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적극 관여한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식민 지배를 본격화하여 이방인(異邦人)에서 지배인(支配人)으로 자리바꿈하였다. 한편, 이 시기 전국적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는 자강 운동(自强運動)·구국 운동(救國運動)의 진원이었다.

러일 전쟁 직후 일본은 조선 개화를 유도한다는 명분으로 ‘시정 개선(施政改善)’을 내세워 외교, 재정, 내정을 장악하였다. 교육을 장악하기 위해 신설된 ‘학정 참여관(學政參與官)’제는 대한제국의 교육 업무를 통제할 수 있는 합법적인 토대였다. 학정 참여관은 계약 조건 제2조 “대한제국 학부 대신(學部大臣)은 교육에 관한 모든 사항을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에게 자순(諮詢)하여 그 동의를 거친 다음에 시행한다.”에서 교육 행정과 운영에 걸쳐 자문할 수 있는 위치를 보장받았다. 시데하라는 1900년부터 중학교에 외국인 교사로 재임하던 인물로, 한국의 교육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통감부 설치 이후 전개된 각 학교의 교육 과정 개정과 교육 시수의 설정은 그의 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입안(立案)한 「한국 교육 개량안(改良案)」은 통감부 교육 정책의 방향이었다.

제1 일본 제국 정부의 대한 정책에 따라 장래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서 만반의 시설을 개량하는 데 적당한 교육을 베푸는 것을 본지(本旨)로 한다.

제2 한국민으로 하여금 선량(善良)하고도 평화(平和)한 미성(美性)을 함양하게 하는 것을 기(期)한다.

제3 일본어를 보급한다.

제4 종래 한국의 형식적 국교였던 유교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신지식을 일반으로 개발한다.

제5 학제는 번잡을 피하고 과정은 비근(卑近)하게 한다(『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 6, 1905년 4월 11일).

이 개량안에서 일본의 의도는 정치적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요약되며, 교육은 한국인을 개량하는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내용은 일본의 지도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개조하고, 일어를 보급해 동화 의식을 제고하며, 학제를 개편하는 것 등이었다. 의도는 교육을 장기적인 구상과 단계적인 학제 마련보다는 “제사(諸事)에 간이(簡易)와 이용이 요구되는 한국에서 국민의 교육적 향상심을 조장하려면 가급적 속성의 행로를 취하는 것이 편의할 것”에서 비롯한 정책이었다. 통감부 당국은 1906년 각종 교육령을 개정하여 관·공립 학교를 통제하였고, 자주독립의 중추였던 사립학교를 억압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교육 내용을 개변(改變)하고, 학교 현장에는 일본인 교사를 임명함으로써 실질적인 교육 담당자로 자처하였다.

조선의 교육을 개량할 의도로 임명된 학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학부 차관을 비롯하여 서기관·주사·교감 등으로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특히, 일본인 교사의 임용을 “신교육을 실시하면서 그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 을 쓰는 것은 그 효과를 확실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여, 일본인이 조선 교육 정책을 선도하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사립학교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명분으로 시찰을 통해 학교의 재정 장악에 나섰고, 보조금 지정으로 인가된 학교에는 일본인 교감을 파견함으로써 학교의 개량과 동화를 적극화하였다. 1908년 9월 12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별보(別報)에 소개된 내용 가운데, “교육으로 하여금 정치 밖에 독립케 하는 것은 학무상에 필요한 일이라. 그러나 흔히 학교를 정치의 기관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자 있으며, 또 정한 바 과정은 치지하고 현금(現今) 정치상과 사회상의 문제로 토론하는 자”는 교육의 근본을 흐리기 때문에 주의할 것을 경계·경고하고 있다. 나아가 1910년 학부대신은 「학부 훈령(學部訓令)」 제1호에서 “범교직(凡敎職)된 자는 …… 교육과 정치를 혼동치 못할 사(事)로 계유(戒諭)한 소이러니.”라 하여 각 지방관들에게 교육의 정치화를 엄중 경계토록 지시하였다.

1906년 학교령이 개정되자, 교육 현장에서 교육 과정과 수업 시수 등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수업 연한은 4년으로 하였다. 중학교를 고등학교로 개칭함으로써 조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 단계로 정착시켰다. 이러한 교육 제도적 측면 외에 교육 내적인 영역에서도 변화가 뒤따랐다. 즉, 교육 과정에서 일어가 필수 과목으로 편제되어, 장차 동화를 위한 식민지 교육의 합법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어는 이미 관립 학교를 통해 조선에서 일반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립학교에서도 중요한 외국어 과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어 습득은 “한국인으로서 일어를 해득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생존 경쟁상 현저히 이해관계가 있다. 즉, 일어를 이해하고 해득하는 사람은 관리로서 추요(樞要)하고 유력한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 상업하는 데도 또 같은 이익을 얻기 쉽고, 관·민간에 직업을 얻는 데 대단히 편리하다.”158)高橋濱吉, 『朝鮮敎育史考』, 1927, 172∼173쪽 : 손인수, 「근대 교육의 확대」, 『한국사』 45, 국사편찬위원회, 2000, 61쪽 재인용.는 명분이었다. 또한, “한국 아동의 장래 행복을 도모하는 데 일어 교수가 가장 필요하다고 인정”된다고 역설하여, 일어는 하나의 교과목이자 장래를 대비하는 당당한 정책 교과로 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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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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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관·공·사립학교는 양적으로 증가한다. 관·공립학교의 증가는 일본인 교사의 증가와 더불어 충량한 신민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정책의 자화상이었다. 반면, 사립학교의 증가는 독립과 국권 회복이라는 구체적 목표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감부는 관·공립학교의 증설과 사립학교의 정리를 강조해 나갔다. 또한, 당국은 국가 교육의 외곽 지대에서 국민 교육을 담당하던 서당에도 주목하였다.

1908년 9월 「서당 관리에 관한 건(학부 훈령 제3호)」에는 모두 6개 항으로 된 방침이 제시되었다. 이 방침에 따르면, 전통 교육을 담당했던 서당은 교육 내용·교육 과정·교육 환경 등에서 신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서당 소재지에 보통학교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지 방 자제로 보통학교에 입학할 연령에 달한 자는 먼저 보통학교에 입학하게 함을 상례로 하여” 보통학교 입학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서당이 구식 학문의 온상이라는 인식을 심화시킴으로써, 장차 일본어와 산술 등 근대 학문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통감부의 서당 정책은 보통학교 확대에서 빚어진 정지 작업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에 맞서 언론에서 제시한 서당 개량안은 학교 교육으로 전환, 교육 내용 변화로 요약된다. 특히, 교육 내용은 “신지식이 있는 교사를 연빙하여 내외국 지리·역사·국어·산술·체조 등 과정의 대강이라도 배워” 신교육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일부 서당은 사립학교로 전환하거나 사립학교에 전답을 제공하였고, 역사나 지리 등의 신학문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서당에 대해 여전히 ‘신학문의 풍조를 방해하고’, ‘완고한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비판 논조가 병행되었다.

통감부는 공립학교를 증설하기 위해 1908년 ‘보조 지정 보통학교’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 방침은 사립학교를 공립으로 전환함으로써 통감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교육 기관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로 지정되면 일본인 교사가 파견되었고, 그들은 교감 자격으로 교육 재정과 교육 행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일어를 사용함으로써 식민지적 인간 창출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나 지리를 왜곡하는 중심에 있었다. 조선인을 선도하고 폐습을 개량한다는 ‘모범 교육(模範敎育)’은 일본인 교사의 선도로 실현되어 나갔다.

학부에서 금년에 새로 설립한 공립 보통학교 14곳에 훈도를 모두 일인으로 서임하였는데 그 일인들은 지금 일본에 있어 학부에서 통감부로 조회하고 일인 14명을 속히 불러와서 시무케 하라 하였다(『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2일자 잡보).

일본인 교사가 공립학교와 일부 사립학교에 배치될 수 있었던 것은 각종 「학교령(學校令)」 공포에 따른 교수 시수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인 고빙은 이미 1906년 예산 책정과 더불어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었고,159)『만세보』 1906년 11월 17일자 잡보에 따르면, “학부 명년도 예산 조정액이 30만 원인데 그 중 18만 원은 경성과 각 지방에 보통학교 25개소를 증설할 예산액인데 각 학교에는 일본인으로 교사를 연빙한다더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듬해 4월 울산군 등 공립 보통학교 25곳에 일본인을 파견하였다. 또한, 증설을 계획하고 있는 공립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파견함으로써 교육 현장을 지도해 나간다는 것이 학부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한 예로, 1909년의 『관찰사 회의 요록』에 보이는 “사립학교 중 교통이 편하고 비교적 중요한 지구에 위치해 설비(設備)가 완전한 학교, 즉 교지·교사를 소유하고 그것을 유지할 상당한 재원이 있는 학교를 약 30개 선발하고 그것을 보조하기 위해 교원을 파견하여 모범적 경영을 할 것”이란 계획은, 교육 현장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해 나가겠다는 통감부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통감부의 의도대로 일본인 교사 임명은 사립학교까지 확대되었으며, 한일 병합 전야인 1910년에는 일본인 교사가 무려 200명이나 되었다. 물론 일본인의 고용을 일부 언론에서 비판하였지만, 통감부 설치 이후 이들은 자문에서 직접 참여자·집행자로 굳건히 자리하였다. 그 명분이었던 ‘모범 교육’은 폐습과 인습에 젖어 있던 조선의 전통을 바꾸고 근대화하는 정책으로 미화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교사는 필수 교과였던 일어를 가르침은 물론 친일 교육을 전담하는 전위대(前衛隊)로서 조선인에 대한 교육을 제도적·내용적 차원에서 합법화해 나갔다. 이와 더불어 당시 사회적으로 일어 습득은 직업과 능력을 인정받는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일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김대희(金大熙)의 시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어(日語)로 말하면 물론 모(某) 학교하고 기(其) 과목 중에 일어 시간이 기반(其半)에 거(居)하여 일어에 전심을 용(用)하고 학생도 역연(亦然)하여 당초에 학교에 입(入)할 시에 기주의 경영(其主意經營)이 일어 마디나 학습 하여 일본인의 고용이나 통변 노릇이나 하여 호구(糊口)하자 하고 기소료(其所料)가 도불과걸인적노예적사상(都不過乞人的奴隷的思想)이오 독립 자존할 사상이 아닐뿐더러 ……(김대희, 『20세기 조선론(朝鮮論)』,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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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조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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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관·공·사립학교에서 일어는 필수 과목으로, 사회 진출을 위한 가장 중요한 교과로 자리하였다. 김대희는 ‘걸인적·노예적 사상’을 추구하는 교육 현실을 질타하였고, 독립 자존하지 못하는 국가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의 통변하는 자나 되어 몇 푼 월급을 얻으려 함이며 그렇지 아닌즉 외국인과 교제나 하여 그 세력에 의지하여 동포나 능멸하고 해롭게 할 뿐이니 무슨 겨를에 고상한 사상이나 문명의 근원을 탐지하리오.”라고 한 논설은 외국어가 문명 개화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굳어진 현실을 잘 보여 준다.

1908년에 공포된 「공·사립학교 인정 규정」에는 사립학교에 대하여 관립 고등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되면 판임관(判任官)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학력을 통한 자생적 민족 의식을 약화시켜 이들을 제도권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였고, 실제 관직에 진출한 이들은 외국어 학교·각종 학교·견습소 출신 또는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160)손종현, 「구한말 학력 제도의 성립과 변천」, 『교육 철학』 12, 1994, 85∼86쪽. 일어 교육이 중시된 것은 관계 진출이라는 유효한 수단이 일본에게 잠식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더불어 통감부는 입학 연령의 하향화를 획책함으로써 어릴 때부터 일어를 배우도록 강제하였다(김영모, 『조선 지배층 연구』, 일조각, 1986, 290∼296쪽). 사회에 진출하기 유리한 학교들을 ‘학력’이라는 기준으로 통제함으로써 단기간에 학력을 획득할 수 있는 속성과나 관립 학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이들에게 학교는 식민 제국의 위력을 각인시킴으로써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유력한 장이었다. 이로써 근대 문명과 문화에 압도된 식민지 대중은 자신이 열등하거나 무능하다는 부정적 자아의식을 은연중에 주입받았다. 이를 통해 통감부는 민족 운동·애국 정신으로 무장된 인물 양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교육이 더는 정치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통감부의 방향과 달리 국권 회복을 위한 교육 운동도 전개되었다. 일본의 식민지화가 심화되자, 교육을 국권 회복을 위한 핵심적인 분야로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통감부 당국은 여러 교육 기관과 교육 단체 등 학교 설립 주체에 대한 통제, 교육 내용의 균질화, 교육 현장의 어용화 등이 그들의 목적과 부합되었기에 조선 교육계의 자활적 운동을 크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육이 국권 회복과 애국 정신 함양과 연계되고, 교육을 통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인재가 양산되자 보통 교육에 대한 비판을 가시화하였다. 교육이 국권 회복과 직결된다는 주장은 교육 단체나 신문, 사립학교 등에서 더욱 일반화되어 갔다. 『대한매일신보』는 논설에서 국운(國運)이 쇠퇴한 이유가 교육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고, 교육자에게 국민 정신을 배양하는 교육을 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립학교령」으로 위기에 직면한 교육을 부흥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과 극복 방안을 제시하였다.

어두운 민지(民智)를 문명케 함도 여러분께 있고 떨어진 국권을 회복함도 여러분께 있고 사회의 악한 습관을 바르게 함도 여러분께 있는지라 ……(『대한매일신보』 1908년 12월 11일자 논설).

교육가 제공(諸公)들이 일제 협력하여 상당한 기본금을 구취하되 한 촌에서 못하거든 한 면이 합하여 하고 한 면에서 못하거든 한 고을이 합하여 하고 한 고을에서 못하거든 두어 고을이 합하여 완전한 학교를 설립하고 일면으로는 학교를 확장하여 교육의 풍력을 권장할밖에 없도다. 과연 이렇게만 하면 비록 정부에서 기본금이 부족한 학교를 폐지할지라도 기본금이 완전한 학교는 보전할 터이니 이것이 어찌 양책(良策)이 아닌가(『대한매일신보』 1908년 12월 6일자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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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재정을 지원한 각 동별(洞別) 기록
학교에 재정을 지원한 각 동별(洞別)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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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교육은 국권 회복의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에 학교 설립의 중요성이 누누이 강조되었다. 사립학교는 대부분 개인뿐만 아니라 유력한 지역 인물들이 연합하여 세웠고, 각종 교육 단체의 지원으로 운영된 사례도 많았다.161)김정해(金丁海)의 연구에 따르면 1895∼1909년까지 사립학교 설립자의 성분은 50% 이상이 전직 관리나 유지였으며, 다음으로 현직 관리가 15%였다고 한다(김정해, 「1895∼1910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 『역사 교육 논집』 11, 1987, 139∼140쪽).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금 마련이 절실하였는데, 전현직 관료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이 공동으로 운영비를 출자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그리고 재원이 부족할 경우, 두세 명이 연합하여 운영비를 마련하는 방안이 강구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전답·곡식·비품·교과서 등의 물품 제공도 늘어났다.

한편, 통감부는 사립학교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예의 주시하여 그 저항을 무마해 나갔다. 특히, 국권 회복을 주장한 사립학교를 억압·통제하고, 공립학교로 전환시키거나 폐교 조치하였다. 갑오개혁기 학부는 사립학교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운영에서 관·공립학교와 차별적인 정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교육이 문명 개화와 부국강병의 근간이라는 취지에 공감하고 있었던 터라 사립학교를 통제하기보다는 확장과 증설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통감부는 사립학교를 언제라도 폐지할 수 있는 공권력을 행사하였고, 나아가 사립학교의 자율성을 억압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1908년 「사립학교령」은 재정 문제에 집중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사립학교는 지방 유지나 일반인의 찬조·찬학·의연으로 운영됨으로써 매우 힘겨운 것이 현실이었다. 통감부는 사립학교가 직면한 재정 문제를 악용함으로써 자활적인 교육 의지를 재원 불충분이라는 법적 잣대로 탄압하였다. 이 밖에도 통감부는 「기부금 규칙」이나 「지방비법」 등을 제정하여 사립학교의 생존과 운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하였다.

이처럼 통감부 당국은 교육 과정과 재정, 내용을 통해 사립학교의 정치 지향을 말살하고, 나아가 교육 현장에는 일본인 교사를 파견함으로써 사립학교는 물론 공립학교의 식민지성을 신장하는 데 전방위적인 노력을 시도하였다. 결국 통감부 교육 정책은 강제 병합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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