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3장 근대의 배움과 가르침
  • 5. 근대 교육의 현장
  • 교과서
위영

갑오개혁 이후 근대 학제가 마련됨으로써 다양한 교과 내용을 담은 교과서가 필요하였다. 교과서는 일본 교과서를 입수·참고하여 편찬하였고, 일본인이 교과서를 제작하는 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교과서는 ‘국가의 교육 의도를 반영한 교육 매체’로, 개화 지식을 알리는 도구이자 ‘교육의 균 질화’를 이루는 데 가장 가치 있는 교재였다.

소학교의 교과목은 수신·독서·작문·습자·산술·체조·본국 역사·도화·외국어 등이며, 고등과는 여기에 외국 지리와 외국 역사, 이과를 추가하였다. 이 가운데 수신·국어·지리·역사·체조 등은 국가의 정체성과 애국심을 배양하는 교과였다. 그리고 산술·이학·화학·천문은 실용적인 기초 지식을 배양하는 교과였다.

한편, 1897년 12월 현재 소학교의 교과목은 독서·작문·습자·산술·지지·천문·역사·이학·화학 등이었다. 물론 이들 교과목은 학교의 수업 시수 또는 각종 시험과 연계되었다. 『황성신문』(1899년 7월 5일자 잡보)에 따르면, 소학교 학기 시험 과목은 독서·습자·작문·산술·역사·지리였다. 정기 시험은 ‘매학기 및 학년 과정을 학수(學修)한 후에 기업(其業)을 시험’한 점을 고려하면, 교과목 규정과 현장 교과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제시한 교육 이념의 틀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1895년에 「학부 고시」 제4호는 “교육은 개화의 본(本)이라 애국의 심(心)과 부강의 술(術)이 개학문(皆學問)으로부터 생(生)하나니 유국(惟國)의 문명은 학교의 성쇄(盛衰)에 관련한다. …… 그 과정은 오륜행실(五倫行實)로부터 소학과 본국 역사와 지리와 국문과, 산술과 기타 외국 역사와 지리 등 시의(時宜)에 적용한 서책을 실제 교수하여 허문을 없애고 실용(實用)을 향하여 교육을 힘쓰고자 하오니.”라고 하여 과정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학부는 교과 과정을 크게 국가 정신의 함양과 실용 지식의 습득으로 나누었다. 특히, 실용 지식은 서구의 학문으로 등식화되었다. 가령 『황성신문』(1898년 9월 15일자 논설)에서는 조선의 학문이 경서와 사책(史冊)의 구습(舊習)에 전념함으로써 시세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천문학·지리학·농학·공학·의학·산학 등의 서구 학문을 과감히 수용하여 교육할 것을 주문하였다. 보통 교육의 최고 기관이던 중학교는 “실업에 취(就)코자 하는 인민에게 정덕·이용·후생하는 중등 교육을 보통으로 교수하는 처로 함이라.”고 하여, 보통 교육에 바탕을 둔 실용적인 실무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른바 서구의 실용 학문이 중시되면서 전통 교육의 교과는 구습으로 인식되었고, 개화 추진의 원동력으로 서도가 동도보다 효율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선전되었다. 『독립신문』(1899년 7월 1일자 논설)에서는 “하늘천 땅지 검을현 누를황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밤낮으로 가르쳐도 …… 무슨 유익함이 있으리오.”라 하여, 실용적 측면에서 전통 가치의 무용성을 지적하였다. 결국 고유의 교육 전통은 구습으로 근대 지식과 병존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립학교는 어떠한가? 홍문동과 대묘동 학교를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1898년 6월 현재 한문·국한문·대소 습자·산술·역사·지리·체조 등으로 15세 이상의 학생을,162)『독립신문』 1898년 6월 9일자 잡보. 후자는 1897년 1월 현재 한문·여러 가지 글 읽기·글짓기·글자 익히기·산술·조선 역사·지리·수신하기·체조하기·외국말 등으로 7세에서 15세까지의 학생을 가르쳤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외국어로 영어나 일어 등을 교과의 하나로 가르쳤는데, 이는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시세에 부합하고’ 사회 진출에 유리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163)김영우, 「한말의 사립학교에 관한 연구(1)」, 『교육 연구』 1,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1984, 41쪽. 특히, 문명화를 달성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의 조선 진출은 직업과 출세라는 언어 권력을 조장하였다.

이처럼 사립학교의 교과는 국어·한문·작문 등 언어에 대한 이해, 역사와 지리 등 민족과 세계에 대한 이해, 산술과 외국어 등 일상의 실용적인 것으로 나뉜다. 따라서 관·공립 소학교와 비교해 볼 때 교과목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관립 중학교에 준하는 교육을 실시한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광흥학교(光興學校)의 교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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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흥화학교의 교과 시간표
사립 흥화학교의 교과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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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흥화학교가 개학한 지 불과 수삭에 주학원(晝學員) 60여 인과 야학원(夜學員) 90여 인이 규칙을 늠준(凜遵)하야 진퇴좌차(進退坐次)가 제제(濟濟)할 뿐더러 영어·산술·지지·토론 등 각 학문이 일취월장하야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하니 인재흥왕(人材興旺)함을 식목저대(拭目佇待)하겠더라(『황성신문』 1898년 12월 27일자 잡보).

사립 광흥학교를 새문 밖 놉전골 전 경기 감영 집사청으로 옮기는데 학도의 과정은 일어·산술·만국 역사·지리·법률·경제학·행정학·강연(講演)·글 짓는 것·체조요(『독립신문』 1898년 11월 3일자 잡보).

제1조 중학교 심상과의 학과는 윤리·독서·작문·역사·지지·산술· 경제·박물·물리·화학·도서·외국어·체조로 정함이라(『학부령』 제12호, 1900년 9월 7일자).

흥화학교의 교과 가운데 영어·산술·지지·토론 등에 큰 성과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약 2개월 전 설립 당시의 교과로는 영어·산술·지지·역사·작문·토론·체조가 제시되었다. 1900년 학교 과정은 심상과·특별과·양지과로 나뉘는데, 심상과 교과는 영어·영문·산술·지지·역사·물리학·도화학이었다. 광흥학교에서는 일어·산술·만국 역사·지리·법률·경제학·행정학·강연·글짓는 것·체조 등이 교과로 편제되었다. 광흥학교는 이후 1년제 보통과와 3년제 법률과의 전문 과정으로 분화되었다.

이 밖에 1899년 현재 한성의숙(漢城義塾)의 교과목은 경서·일어·지리·역사·산술·작문·물리학·화학·법학·경제학·정치학·국제법 등이었다. 1905년 설립된 보성학교(普成學校)의 심상과는 독서·작문·습자·일어·산술·이학과 대강·지리·역사·도화·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1899년 야학 과정으로 설립된 배영의숙은 경학·일어·산술·물리학·화학·정치학·법률학·만국 역사·본국 역사를 교과목으로 설정하였다. 이처럼 중등 수준에서도 지리·역사·산술·체조·작문 등이 강조되었고, 이 외에 학교마다 특이한 교과도 편제되었다.164)1900년 9월 현재 배재학당의 교과 과정은 ‘전과 같이 영어·한문·지지·역사·산술·화학·이학·문법·독서·작문’(『제국신문』 1900년 9월 5일자)으로, 보통 과목과 실용 과목 위주로 편제하였다. 흥화학교의 토론이나 광흥학교의 강연 등의 교과는 학생들의 사회 활동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 교과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관립 중학교에는 윤리 교과가 편제되어 국가의 교육 이념이 투영되었으나, 사립학교에는 그러한 교과가 설정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당시 사립학교는 교과를 상당히 자율적으로 개설한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측량·어학 같은 실용적인 교과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배재 학당은 1897년 7월 방학 예식 때 문학·한문·영어 등을 시험 봤다. 그 런데 영어 시험은 “한문보다 더 순통을 하니 좌상이 다 크게 칭찬하더라.” 하여 영어의 인기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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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직후의 교과서
갑오개혁 직후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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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문은 『조선 역대 사략(朝鮮歷代史略)』·『통감(通鑑)』·『조선 약사(朝鮮略史)』를 시험하였는데, “보기 싫은 것은 어린아이들을 꿇어앉히고 재미없는 글을 뜻도 모르고 소경의 경문 읽듯이”라고 하여 평가 절하하였다. 또한, 1899년 8월 대구군 사립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를 초빙하여 “일어와 산술과 시무에 요긴한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라 한 것처럼, 지방 학교에서도 일어는 대표적인 시무 교과였다.165)대구군 사립 달성학교도 일본인 교사 1명을 연빙하였고, 과정은 ‘국한문지지·산술·일어’로 편제되었다(『황성신문』 1899년 12월 28일자 잡보).

1900년 9월 경기도 공립 소학교에서도 일본인을 ‘명예 교사’로 고빙하여, 학교에서 “일본어 학교 일과를 더 설시(設施)하고자” 하였으나 학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영어나 일어는 근대 학문을 섭취하는 수단으로, 근대 지식인을 양성하는 데 실용적인 어학을 중시한 풍조를 반영한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립학교에서 영어·일어를 채택한 것은 학생의 사회 진출이라는 현실적 필요성을 부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교육 과정이 마련되었는데도 교과서 편찬은 여기에 부응하지 못했다. 1896년 2월 학부 편집국이 간행한 『신정 심상 소학(新訂尋常小學)』에는 17종의 교과서를 소개하였다. 여기에서 광고한 교과서는 대부분 역사·지리·산술·국어 등으로, 교수 시수에 제시한 교과목과는 거리가 있었다. 1897년에 간행한 『태서신사(泰西新史)』에도 학부 편찬 교과서를 광고하였으나, 전 해보다 3종이 늘어났을 뿐이었다. 학부는 이들 교과서를 관·공·사립학교에 분급(分給)하였지만, 학교에서는 일반 서적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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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정가표
교과서 정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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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소학교에서 논(論)을 지어 학부로 보냈으매 학도 권면하는 훈령과 시무에 마땅한 서책을 좌와 같이 내려 보냈다더라. 『공법회통』 2질·『태서신사』 국한문 5질·『서유견문』 1권·『중일 사략』 10권·『아라사 사략』 20권·『심상 소학』 10질·대한국지도 두 폭·적은 지구 그림 두 폭과 열 문제를 써 보냈다더라(『제국신문』 1898년 11월 2일자 잡보).

교육이 아니면 부성(不成)할 실증(實證)을 어차(於此)에 확효(確曉)할지라 연(然)하나 교중(校中)에 서책이 불비하여 학부에 청구한 외에 산술 책자(算術冊子)와 외국 역사(外國歷史)도 구매(求買)하여 과정에 첨입하며 공부상 섭렵(涉獵)하기 위하여 『법규유편(法規遺編)』과 『보병조전(步兵操典)』을 매래(買來)하여 시시간공람(時時間供覽)하는데 문한즉 현백당(玄白堂)이란 선생이 『중동전기(中東戰紀)』를 중역하여 …… 일질을 매도(賣渡)하시며 …… (『황성신문』 1899년 6월 24일자 논설).

학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로는 여러 학교의 교과목에 충당할 수 없었다. 평양 공립 소학교에 분급된 서적은 교과서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학부에서 ‘교과등서(敎科等書)를 전부준비(全不準備)’라 한 점으로 알 수 있다. 사립 시흥학교는 학부에 서책 분급을 청원하였고, 자체적으로 산술·외국 역사·『법규유편』·『보병조전』·『중동전기』 등을 구입하여 교과에 편제하거나 공람하도록 하였다. 1898년 11월에 진위군의 한 사립학교에서도 학부에 “교원과 서책을 내려 보내달라.”고 하였고, 승동 여학교에서도 ‘소학 몇 질’의 분급을 청원하였다. 학부에서 1898년 10월 배재학당에 『태서신사』 30질을 보내어 학도들에게 분급하였다. 이처럼 학교를 막 설립·운영할 무렵, 교육 현장에서 활용할 교과서의 편찬과 분급은 매우 저조하여, 일반 서적을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1899년에 관제가 마련된 중학교는 이듬해 개교와 더불어 학생을 모집하고, 외국인 교사를 임용하였으나, 정부의 교과서 편찬 노력은 이에 따르지 못하였다. 사실 1906년까지도 교과서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을 “현금(現今) 아한(我韓)은 가위전무교과서지국야(可謂全無敎科書之國也)라.” 한 『황성신문』은 교육 현장에서 일어가 중시되는 현실로는 국가 정신의 함양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였다. 물론 학제 개편 이후 1905년 당시까지 교과서가 늘어나지만, 학부에서 출판한 서적보다는 일본에서 수 입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학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는 역사·지리 교과에 치중하였고,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민간에서 번역한 교과서는 세계사·법률·농업·상업·외국어·미술·산술·물리·화학·수신 등이었다.

교과서의 내용은 교육에 뜻을 둔 사람들에게 최대 관심사였다. 교과서를 ‘국가 사상을 형성하게 하는’ 직접적인 매체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09년 2월 10일자 『황성신문』 논설은 역사 교과서에서 급히 개정해야 할 두 가지는 “고구려 역사에 광개토왕의 묘비를 증거하여 개정할 것이오. 발해 역사를 특필로 표장하여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할 것”을 제시하여 민족 정통성에 바탕을 두고 교과서를 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소학교 교과서의 문제점을 장황하게 지적하였다.

청년을 인도하며 국가의 사상을 함양하며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근본은 저 소학교의 몇 권 교과서가 아닌가 …… 국가 사상을 함양할 재료와 국민 지식을 발달할 정신으로 소학교 교과서를 편찬하되 교수하는 정도를 극히 정세히 연구하여 극히 쉽게 하며 극히 간단하게 하여 아이들을 인도하며, 수업 시간을 적당케 분배하여 1학년에 쓸 것이면 1학년 동안에 다 학습하게 하고, 1학기에 쓸 것이면 1학기 안에 다 학습케 하여 각 학교가 한결같게 할지이다(『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12일자 논설).

소학교 교과서의 취지는 국가 사상과 국민 지식을 고취하는 데 있으므로, 교육 시수에 적합한 교과서를 편찬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이같이 교과서는 시급히 편찬해야 했지만, 통감부는 교육 내용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같은 시기, 일어는 당당한 외국어로 조선어와 동등한 반열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일어 교육이 뿌리내리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조국의 정신을 보전하는 자도 그 나라의 말과 글이오. 독립하고 스스로 존중히 하는 덕행의 성품을 확충케 하는 것도 그 나라의 말과 글이며 애국에 대한 사상을 분발케 하는 것도 그 나라의 말과 글이오. 몸을 바쳐서 나라를 위하는 기운을 발달케 하는 자도 그 나라의 말과 글이라. …… 근일 한국에는 제1차 소학교에서 일어를 교수하며 제2차 각처 학교에서 일어 한 과정은 반드시 가르치게 하더니 지금에 이르러서 도연히 추상같은 관령으로 허다한 교과에 쓰는 서책을 압수하며 인하여 그 도도 추추하는 일문으로 지은 서책을 각 학교에서 쓰게 하니 ……(『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 30일자 논설).

여기에다 교육 현장에서 어용 교육을 선도했던 ‘일본인을 교사로 두는 것도 한국의 정신을 매몰케 함’이라 하여, 국민 교육의 위기 의식이 높아져만 갔다. 『황성신문』에서도 교육 현장은 이미 일어가 압도하는 현실에 직면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문 교과서의 편찬과 국가의 역사와 윤리를 배양할 수 있는 교재의 편찬이 시급하다고 보도하였다.

1906년 이후 여러 학교에서 일어는 조선인이 배워야 할 과목으로 정착되었다. 보통학교 필수 교과는 수신·국어·한문·일어·산술·지리 역사·이과·도화·체조였다. 교육 시수에 일어가 독립 교과로 등장하였고, 본국 역사와 본국 지리가 역사 지리로 통합되었다. 일어의 교수 요지는 회화·문법·작문·번역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일어 습득과 병행하여 조선어의 번역을 권장함으로써, 조선어와 일어는 동등한 위치로 설정되었다.

일어를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고등학교와 사범학교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등학교의 경우 “일어, 회화에 정숙하여 명확한 일어를 이회(理會)케 함을 기하며 항상 발음에 주의하며 또 시시로 정당한 국어로 번역케 함을 요함이라.”라고 설명하였다. 사범학교는 “발음함을 주의하여 회화에 정숙하고 또 정당한 국어로 해석케 하며 또 시시로 번역과 작문을 습케 함이라.”라 하여 보통학교에서 고등학교, 사범학교에 이르기까지 일어는 필수 교과로 자리 잡아 회화·문법·작문·번역 등의 방법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특히, 소학교 과정에 일어가 필수 교과로 되자 “어린 아동의 뇌수를 현혹케 하며 …… 이렇게 하다가는 몇 해 지나지 않아 한국 성질을 보존할 학생이 몇이 못 되리라.”166)『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28일자 논설.는 심각한 우려가 점차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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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태리 독립사』와 『을지문덕』
『의태리 독립사』와 『을지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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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부는 「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을 제정하여 교과서의 내용을 검정 단계부터 장악하였다. 검정위원회에서는 불인가 교과서의 내용 기준을 마련하였는데, 자유·독립·국권을 강조하는 민족적·애국적 내용이나 일본과 정부를 비판하는 항일적인 교과서를 원천적으로 편찬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시책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교과서 검정 기준을 반박하였다.

한국에 학부가 있은 지가 수십 년에 가까웠거늘 아무 완전히 정한 교과서가 없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일어 교과서가 훨씬 흔하여 심지어 소학교 에서 일어로 지은 이과 교과서까지 쓰니 학부는 의례히 인민 중에 교과서 저술하는 것을 권장할지어늘 이제 오히려 교과서 검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어찌 참아야 할 일인가. 대개 오늘날 서적을 저술하는 자의 저술한바 교과서 중에 무슨 독립이라 자유라 충군이라는 정신과 영웅 열사의 사적을 한 말도 기록하지 못하였나니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11일자 논설).

저 학부 관리의 독한 수단이여, 우리 교육계에 정신까지 박멸코자 하는 도다. 하여 그 불평하는 소리가 더욱 높으니 …… 학부 관리들이여, 책 한 벌 검열하는 데 여러 달씩 끌어가는 것이 무슨 연고인가 …… 가장 놀랍고 두려운 바는 애국이라 독립이라 자주라 의기라 협기라 하는 글자나 구절을 말도 못하게 함이다. 학부 관리들이여, 국민을 교육하는 제일 뜻은 무엇이뇨 하면, 즉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를 사랑하며 의기와 협기를 발양하고저 함이 아닌가(『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30일자 논설).

신문은 교육 내용에서 국민의 자율성과 자존성이 없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 같은 인식은 교과서가 ‘인민의 사상을 늘게 하는 기계요, 국가의 실력을 배양하는 기관’으로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직접적인 근거였기 때문이다.

통감부는 교육 과정·교육 내용·교과서 검열 등 일련의 교육 정책에서 충량한 신민 육성을 표방하였다. 충군애국에 바탕을 둔 민족 정신·애국 정신·항일 정신을 제거함으로써 일본이 선도하는 문명 개화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애국 의식을 형성하려는 교육 정책이 도리어 문명국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논리로 역전되었다. 교과서는 ‘국민의 사상을 담은 균질적·제도적 매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 당국은 교과서를 장악함으로써 국민을 계도(啓導)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학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는 탄탄하게 국민 사상을 주입하는 표준 매 체로 인식되었다.

통감부는 교육 내용에서 시대 정신을 억압하고, 교육 과정에서 일본을 찬양하고 민족사를 왜곡하는 교육 입안자였다.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일어 습득이 실용 지식과 직업 획득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을 고려하면, 학교 수업에서 내용 지식은 곧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 함을 말해 준다. 또한, 학교 현장에서 야학교 설치나 직업과 병행한 교과 과정 그리고 교과서 채택 등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은 당시 ‘문명 개화의 교육’이 실용적 지식 배양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더욱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 교과서는 일반인에게 ‘국민의 사상과 정신을 보존하는 매체’였다. 따라서 근대 교과서에는 국가·국민·정신을 이어 주는 핵심 지식과 내용이 응집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근대 지식의 기준을 문명 개화로 설정한 경우에 서구 사상이 담은 교과서관이 중시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그 바탕에 자국의 역사와 윤리와 언어가 먼저 정립되었을 때 가능하였다. 이 같은 인식은 통감부 설치 후 일본 교과서가 수입되거나 일어가 학교에서 필수 교과로 인식되면서 국가 존망이 위기에 다다르자 보편화되었다. 근대적 지식을 주체화·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교과서 수입과 이를 매개한 일어는 ‘자주적 근대’를 말살하고, ‘실용적 문명 개화’ 의지를 초보적 기능 지식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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