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3장 근대의 배움과 가르침
  • 5. 근대 교육의 현장
  • 학생과 학교
위영

갑오개혁 이후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자 누구나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는 다양한 학생들을 일정한 규율에 따라 관리·통제하였다. 이 같은 학사 행정은 학생이 입학하면 시작되어 졸업하면 끝난다. 학생 신분으로 인정되는 입학에서부터 졸업까지 공존한 여러 통제 방식을 통해 당시의 교풍(校風)을 알 수 있다.

관·공립학교는 물론 사립학교의 학생 모집은 『관보』나 신문을 통해 입학 지원 대상자에게 공고되었다. 또한, 각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입학이나 시험에 필요한 준비 서류를 미리 갖추도록 하였다. 다음은 1898년 9월 외국어 학교의 입학 공고와 시험 과목이다.

외국어 학교 학원(學員) 권부(權赴) 광고

금(今)에 관립 일·영어 학교에 학원을 가선(加選)할 터이니 입학하기 원하는 자는 본월 12일로 위시(爲始)하여 본월(本月) 20일 내로 본부에 품고(稟告)하고 21일에 본부(本部)로 진(進)하여 입학 시험을 수(受)함이 가(可)함. 9월 12일 학부

외국어 학교 학원 시험 규목(規目)

일(一) 입학자의 연(年)은 16세 이상 25세 이하 자로 함.

일 입학 시험을 좌(左)와 여(如)함. 국문의 독서 작문, 한문의 독서 작문.

일 입학 시험에 응(應)코자 하는 자는 제1호 서식을 의(依)하여 품청장(稟請狀)을 구정(具呈)하고 시험 후 입학 허가를 득한 자는 제2호 서식을 조(照)하야 보증장(保證狀)을 정출(呈出)함이 가함(『황성신문』 1898년 9월 15일자 관보).

이 공고에는 시험 일자와 입학 자격, 시험 과목, 제출 서류 등이 제시되어 있다. 관립 외국어 학교는 학부 직할로 비교적 재정 지원이 탄탄하고, 어학을 전문적으로 교수하는 기관이었다. 시험 과목은 국문과 한문의 독서·작문으로, 사범학교와 중학교, 의학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데 유교 경전이 중시되었던 것을 보여 주며, 근대적 지식의 이해 여부는 당락의 기준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입학 자격으로 중학교는 고등 소학교 졸업자를, 의학교는 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이는 학생 수용을 위한 임시 방안이었다. 대부분의 학교는 상급 단계의 입학 규정이 없었고, 단지 연령과 시험 과목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학제 간의 유기적 성격은 매우 취약하였다. 물론 고등 소학교는 심상 소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학생의 지식 정도나 교육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연령 기준도 규정과 달리 공고되기도 하였다. 앞의 외국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는 16세 이상 25세 이하이지만, 규정에는 만 15세에서 23세로 되어 있었다. 한성사범학교는 규정에 따르면 20∼25세이지만, 입학 공고에는 20∼40세 또는 22∼40세로 되어 있었다. 또한, 소학교는 만 15세까지 입학 자격이 있지만, 실제 15세 이상 학생들의 입학도 허용되었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상학(上學)이라 하였으며, 계절에 따라 등교 시간과 수업 시간이 달랐다. 1899년 3월 13일자 『황성신문』 잡보에는 수업 시간이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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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수업 시간표
1909년 수업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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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일∼입추일: 오전 8시(상학)∼오후 6시 30분(하학)

춘분일∼입하 전일, 입추일∼추분 전일: 오전 9시(상학)∼오후 5시 30분(하학)

입춘일∼춘분 전일, 추분일∼동지 전일: 상오 9시 30분(상학)∼오후 4시 30분(하학)

입동일∼입춘 전일: 오전 10시(상학)∼오후 4시(하학)

학생들은 짧게는 6시간, 많게는 10시간 30분 동안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실제 이 기준은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수업 규정은 육영공원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매일 6시간 정도였고, 겨울에는 4시간으로 단축 수업을 하였다. 한성사범학교와 성균관의 교수 시수는 매년 42주, 매주 28시간이었다. 특히, 1899년 한성사범학교는 지구 개론(地球槪論)이 첨가되자, 학생들의 수업 시간을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로 조정하였다. 외국어 학교의 수업 시수는 매일 5시간이었는데, 영어 학교는 매주 27시간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의학교의 교수 시수는 체조 시간 외에 매일 5시간으로 하되, 조정할 수 있었다. 중학교는 매주 30시간, 매일 5시간으로 하되, 실습 시간과 체조는 별도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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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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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마다 반 구성은 거의 유사하다. 학교는 입학 자료와 시험 결과를 가지고 학생의 반을 나누었다. 반의 명칭은 앞서 언급했듯이, 육영공원은 관직의 유무에 따라 좌원과 우원으로 구분하였고, 갑오개혁 이후 학교는 1·2·3반과 갑·을·병반 등으로 하였다. 한편, 관립 중학교는 입학생의 학력에 따라 고등 소학교 졸업생을 서반, 일반 입학생을 동반으로 나누었다. 한 반의 인원수는 입학생의 정도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한성사범학교는 한 학급의 생도 수는 20명 이상 60명 이하였지만, 실제 학생 수는 한 학급에 준하는 정도였다. 1899년 7월 현재 영어 학교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영어 학교 교사 허치슨씨가 그 학도의 반수와 좌차대로 적어서 학부에 편지하기를 …… 금번에 도강 문제는 작년에 비하면 심히 적은 것은 첫째는 일기가 촉박하고 둘째는 1반 학원이 다 학교에 나가서 해관과 및 다른 곳에 쓰였는데 지금 1반 학원의 학력이 3반에 지내지 못한 연고라 하였는 데 1반에 18인, 2반에 10인, 3반에 10인, 4반에 12인, 5반에 20인이라더라(『독립신문』 1899년 7월 10일자 잡보).

학급은 모두 다섯 반이고, 학생은 10∼20명이었다. 여기에서 반을 나누는 기준은 학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보조 공립 소학교 규칙」(학부령 제1호)에 따르면, 공립학교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학생 수는 40명이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지방 학교 대부분은 학생이 부족하였다. 그리고 소학교 교사 한 명이 담당할 수 있는 적정 학생 수는 30명가량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1년 5월 23일자 『제국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양천군의 공립 소학교는 “30여 명 학도를 한 교원이 가르치지 못하겠으니 군수가 천거한 대로 조속히” 부교원 임용을 청원하였다. 이처럼 30명의 학생을 교사 한 명이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교원 임용을 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학부는 학생의 진급, 휴학과 정학, 퇴학과 출학 등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였다. 휴학은 방학, 정학, 기념일, 운동회, 집안 사정, 천재지변 등으로 수업을 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 할 수 있었다. 이럴 경우 학부에서는 학교의 청원에 따라 휴학·정학을 결정하여 하달하였다.

본월 12일은 아라사(俄羅斯)의 새해 경절(慶節)인 고로 대한 아어 학도들이 12일로부터 14일까지 휴학(休學)한다더라(『독립신문』 1899년 11월 2일자 잡보).

관립 매동보통학교 기지 안에 사는 집에서 아이가 역질하는데 전염할까 염려하여 학교에서 정학하든지 내보내든지 좌우간 훈시하라고 해 학교에서 학부에 보고하였더니 3일을 정학하는 고로 재작일부터 정학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2일자 잡보).

외국어 학교였던 아어 학교(俄語學校)에서는 본국의 국가 기념일에 휴학하였다. 중학교·의학교에서도 조선 명절 외에 외국 명절도 휴학할 수 있었다. 이들 학교에 외국인 교사가 근무하였기 때문에 휴학 규정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학은 휴학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역질·괴질 같은 전염병으로 정학하였다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한편, 퇴학은 출학(黜學)과 비교해서 살필 필요가 있다. 1895년에 마련된 「한성사범학교 규칙」(학부령 제1호)에는 퇴학 사유로 “학업 부진하며 혹 연속하여 2회 낙제한 자, 불고결석(不告缺席)이 반개월 이상에 이른 자”의 항목이 있다. 그리고 이듬해 「성균관 경학과 규칙 개정」(학부령 제4호)에서는 “불고흠석(不告欠席)이 1개월 이상에 이른 자”로 앞의 사범학교와 달리 약간 유연한 퇴학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1899년 마련된 「의학교 규칙」(학부령 제9호)에서는 퇴학과 출학이 법적으로 구분된다. 퇴학은 질병, 부득이한 사유로 한정되고, 출학은 항목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고흠석(無告欠席)이 일주일 이상에 이른 자’에게는 출학을 명한다는 항목이 보인다. 또한, 학업 부진, 품행 불수(品行不修), 전학, 규칙 위배가 출학의 세부 항목으로 명시되었다. 출학의 항목이 늘어난 이유는 학생들이 독립 협회에 참여하거나 학생 간의 모임이 조성되는 분위기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1898년 11월 8일자 『제국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학부에서 경무청에 훈칙하기를 백성들이 모인 중에 각 학교 학도들이 가서 참례하는 자를 일일이 사득하여 금단하라.”고 한 점은 학생들의 교외 활동을 ‘부당(不當)한 사항에 참의망론(參議妄論)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리고 1898년 12월 배재학당에서 결성된 취영회(聚英會)의 설립 목적 가운데 “정치를 의론함이 아니오 …… 충군애국하는 마음으로 토론만 힘쓰며”라 하였는데, 그 취지는 모임의 정치적 성격을 부정함으로써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 이는 학부나 학교 당국이 출학으로 학생 을 강제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학부에서 출학 사유를 늘린 것은 교육의 내실화를 도모하려는 방안이었지만, 학생의 전학이나 단체 활동까지도 통제한 것은 제도적 한계로 이해된다. 1899년 이전 퇴학은 다음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각종 학교에서 무고히 퇴학한 생도의 거주·성명을 학부에서 낱낱이 적어 경무청으로 훈령하고 학비를 도로 물려받아 보내라 한 고로 경무청에서 각서에 신칙(申飭)하야 그 학비를 당장에 도로 받아서 학부로 보냈다더라(『독립신문』 1897년 4월 6일자 각부 신문).

사범학교 학도 주순남과 제동소학 학도 오일한은 전입 일어교하였고 흥화교 학도 방갑술은 영어교에 전입하였기로 일변 퇴학되고 학부에서 엄훈하여 해(該) 3명은 타교에 입(入)치 못하게 하였더라(『황성신문』 1898년 11월 7일자 잡보).

퇴학당한 학생은 다른 학교 입학은 물론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즉, “출학을 명한 자는 관·공·사립 각종 학교에 부학(赴學)을 허락 맡고 각 부 원 청에 조회하여 수용함을 얻지 못함이라.”(『독립신문』 1899년 7월 11일자 잡보)라는 내용은 모든 학교의 출학 규정으로 명문화되어 학생의 입학은 물론 관직 진출도 허용되지 않았다. 앞의 사례는 무단 퇴학한 학생의 학비를 강제 환수하였음을 알려 준다. 환수 금액은 1895년 11월 「각종 학교 퇴학생도 학비 환입 조규」와 1896년 3월 「관·공립 각 학교 생도 출학 처분」에서 소학교는 1개월 이내면 1원, 2개월 이내면 2원이었다. 그리고 사범학교와 외국어 학교는 1개월을 기준으로 각각 1원 50전, 2원 50전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출학 사례는 ‘언사 불공한 자’, ‘공부에 태만하여 석 달을 넘어 폐공(廢工)할 지경에 이른 자’, ‘1개월 동안 무고히 상학하지 아니 함’, ‘자기 자의로 시골집에 내려간 자’, ‘학교 규칙을 지키지 아니하고 불미한 행위를 하여’, ‘배일(排日) 학도라 지목하여’, ‘시험 거행하는 데 협잡이 탄로되어’ 등 학생의 수업과 행동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례로 1899년 11월 영어 학교 학도 12명이 출학되었는데, 경무청에 훈령하여 학생들을 잡아 가두고 매삭 벌금은 2원 50전으로 환수하도록 훈령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출학은 학부나 학교의 광범위한 권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사는 법적인 장치 외에 체벌이라는 수단으로 학생을 강제하기도 하였다. 교사의 학생 체벌은 규칙에 없었기 때문에, 자의적인 형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남별궁 뒤 관립 소학교에 있는 박교원이 학교 규칙에 없는 매를 심히 쓰는데 일전에 어린아이 둘을 몹시 매를 때리고 한명순이란 학원은 별로 잘못한 일도 없이 매를 때리라고 하다가 듣지 안 하니까 그 학원의 부친을 불러다가 대단히 준축을 하였단 말이 있더라(『독립신문』 1896년 10월 27일자 잡보).

이는 학생에게 규칙에도 없는 체벌을 행한 교사의 권위를 보여 주는 일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체벌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법어 학교(法語學校) 외국인 교사가 학생을 구타하고 도망한 사건도 있었다. 교사의 체벌로 학생들은 집단 퇴학도 불사하였다. 1907년 교동 일어 학교에서 교사가 “상학할 시간이 지나도록 교사가 오지 않다가 여러 시간 후에 오거늘 시간 어김을 학도들이 질문하였던지 그 교사가 학도를 자의로 난타하는지라 학도들이 그 사건에 대하여 일제히 퇴학하기를 결의하되 학도가 교사의 압제를 이같이 받으니 어찌 분하지 아니 하리오. 학도 중에 누구든지 상학하는 자가 있으면 밟아 죽이겠다 하고 다 퇴학한지라.”한 것처럼, 교사의 자의적 체벌에 학생들은 퇴학으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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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등생에게 지급한 상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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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에서도 교사의 체벌과 구타 등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1909년 봉명학교에서는 일본 관광단 환영 행사를 학생들에게 지시했으나, 학생들이 거부하자 교사가 학생 대표였던 ‘김영운을 무수히 구타하여’ 학생들이 퇴학한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규칙에도 없는 체벌뿐만 아니라 구타까지도 자행한 일이 있었고, 학생들은 명분 없는 체벌에 퇴학 등으로 저항하였다.

학교에서 실시한 졸업과 진급 시험은 학생의 학업 성취와 교사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시험은 입학 시험을 비롯하여 임시 시험·정기 시험·졸업 시험 등이 있었다. 이들 시험의 명칭은 연종 시험(年終試驗)·졸업 시험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시험 일정은 대체로 『관보』나 신문에 게재되었고, 그 결과는 학부에 보고되었다.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최우등생·우등생·급제생·낙제생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 가운데 최우등생과 우등생에게는 연필, 공책 등을 지급하는 일이 많았다. 우등생의 기준은 정기 시험에서 모든 교과목의 성적이 70점 이상이면서 교과목 평균 점수가 85점 이상이었고, 교과목 성적이 50점 미만인 교과목이 하나라도 있으면 낙제되었다.

통감부 이후 제정된 「보통학교령 시행 규칙」·「고등학교령 시행 규칙」에 따르면 학생의 각 교과 성적이 10점을 기준으로 최소한 4점 이상이고 전체 평균이 6점 이상인 경우에 진급·졸업이 가능하였다. 시험 과목은 1897년 일어 학교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3년 전기: 독서·역사·지리·이과·번역·서취·산술·체조

제2년 후기: 지리·회화·독서·산술·번역·서취·체조

제1년 전기: 독서·번역·서취·회화·체조(『독립신문』 1897년 7월 10일자 잡보)

학기 시험은 3일 동안 시행하였다. 학기 시험이 실제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 일어 학교의 학년별 교과 비중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를 토대로 할 때, 1∼3학년에서 가장 중시된 교과는 독서·번역·서취·체조였고, 다음으로 회화·지리·산술, 끝으로 역사·이과였다. 시험 기간은 하루에서 일주일까지로 매우 다양하였다. 월종(月終) 시험은 대체로 단기간이었지만, 연종(年終) 시험은 3∼7일 정도로 과목에 대한 세부적인 평가가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립 소학교는 10일 동안 시험을 치른 적도 있었다.

학생들은 학기 말에 진급·졸업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면 증서를 받았다. 시험 결과는 졸업 후의 진로를 결정하거나 진급할 때 반편성 자료로 활용되었다.

학부 관립 소학교에서 지난달 23일에 심상과 수업한 1년급, 2년급, 3년급 학도로 학기 시험을 행하였는데, 시험에 응하여 1년급에서 2년급으로 나아가고 2년급에서 3년급으로 나아간 자는 236인이요, 3년급에서 졸업한 자는 31인인데, 이달 5일에 졸업 증서와 진급 증서를 주고 심상과 3년급에서 졸업한 자는 고등과 1년급에 수업케 한다니 ……(『독립신문』 1896년 5월 7일자 잡보).

앞의 기록은 시험 결과에 따라 학생과 교사를 평가한 사례이다. 특히, 교사에게 포장 증서를 준 기준은 학생의 성적과 졸업이 3분의 1이었다. 이는 1899년 「학부령」 제10호에서 “학원의 진취(進就)는 해 교관 교원(該敎官 敎員)의 교수한 학원이 상증(賞証)이나 진급이나 졸업이 3분의 1이 과함을 준(准)함이라.”는 규정에 근거하였다. 또한, 포증이 두 번이면 승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매년 실시하는 진급·졸업 시험에 교사들은 상당한 정력을 소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각 학교에서 실시하는 시험과 그 결과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학력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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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증서
졸업 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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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졸업 증서는 학력에 바탕을 둔 보통 교육의 증거물로, 상급 학교의 진학과 사회적 상승의 상징물이었다. 졸업식은 국가에서 요구하는 교육을 무난히 마쳤다는 표징인 동시에 통과 의례의 하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배재 학당과 일어 학교는 그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배재 학당은 개회사-졸업장과 상품 수여-주임 교사의 학교 현황 보고-교장 연설-학부대신 연설-내빈 연설-학생 답사-폐회사-연회의 순으로 진행하였다. 일어 학교의 예식은 학원 착석-내빈 착석-개식-졸업장과 상품 수여-본교 주임 교사 보고-외국어 학교장 연설-대신 연설-내빈 연설-학도 답사-폐식-내빈과 학원 연회의 순이었다. 행사는 정부 관료와 외국 공·영사, 기 자, 일반인의 큰 관심과 기대 속에 치러졌다. 또한, 행사장은 국기 게양·애국가 제창·국왕 축수·연설 등이 어우러져 교육을 통한 문명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학교는 대부분 방학에 들어갔다. 방학은 학교마다 달랐지만, 여름 방학은 길고 겨울 방학은 짧았다. 학기 시작은 8월 말이나 9월 초로, 여름 방학이 끝나면 곧 1학기가 시작되었다. 겨울 방학은 12월 하순에서 1월 초까지 약 20일가량이었다. 소학교는 휴업 기간을 일요일과 방학을 포함해 모두 90일 내로 제한하였다. 외국어 학교·중학교·의학교는 여름 방학이 60일 이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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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일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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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기간에 학생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내려갔고, 일부 학생들은 면학하기 위해 야학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방학 외에 휴학일은 대부분 국가 기념일로, 학생들은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왕실의 영광을 축원하였다. 명절은 갑오개혁 당시 개국 기원절·대군주 탄신·서고일 등에서, 이후 만수 성 절·천추 경절·흥경절·계천 기원절·외국 명절로 늘어났다. 이렇듯 국가 기념일은 학생들에게 황실의 존엄을 재확인시키고, 교육 현장에서 충군애국의 일체감을 다지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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