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3장 근대의 배움과 가르침
  • 5. 근대 교육의 현장
  • 교사
위영

교사는 전통과 근대를 모두 경험한 지식인층에 속한다. 이들은 근대적 지식을 교수하면서도 전통적 사회 관념을 무시할 수 없는 자리에 있던 독특한 존재였다. 교사 양성은 1895년 설립된 한성사범학교가 그 출발점이 되었다.172)사립학교 교사의 경력은 김영우, 앞의 글, 1984, 48∼50쪽 참조.

<표> 한성사범학교 졸업생 중 임용자와 비임용자 대비
졸업 연도 졸업 횟수 졸업생 현황 임용자 현황 비임용자 · 임용
지연자 수
비율(%)
졸업생 누계 졸업생 누계
1895 1 28 28 26 26 3 10.7
1896 2 41 69 31 57 14 34.1
1897 3 44 113 32 89 25 56.8
1899 4 26 139 20 109 8 30.8
1902 5 9 148 9 118 0 0.0
1903 6 24 172 23 141 5 21.7
1905 7 23 195 23 164 0 0.0
*노인화, 「대한제국 시기 관립학교 교육의 성격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문, 1989, 130∼131쪽.

국민 교육을 위해 가장 시급했던 것은 교사 양성이었다. 근대적 학제 가운데 사범학교 관제가 가장 먼저 마련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학부는 사범학교 입학과 졸업은 물론 교사 임용과 임명·징계·봉급 등의 사안을 관장하였다. 한편, 한성사범학교 졸업자는 1906년까지 195명으로, 졸업생이 모두 교사로 임용된 것은 아니었다. 임용 문제가 불거지자 학부는 새로운 방안을 마련하였다. 즉, 1899년에 졸업생을 시험하여 선발한 임용 제도가 그것이었다. 이전까지 졸업장은 교원 자격증을 의미하였지만, 이젠 시험 자격증으로 간주되었다.

임용 제도에 대해 교사 적체에 따른 수급 상황을 타개하거나 졸업생의 지방 학교 부임을 기피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제도가 궁극적으로 공교육의 건전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임용 시험 과목은 독서·작문·지리·산술이라고 보도하였다. 한편, 1899년 5월 6일자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증산군 공립 소학교 교원의 시험 과목은 『논어』와 『맹자』였다고 한다. 물론 공립 소학교 교원은 한성사범학교 졸업자 가운데서 뽑았지만, 교사에 적합한 인물인지는 학교에서 배운 근대적 지식 내용보다는 유교 경전을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사실 1906년까지 졸업생은 교육 기간이 대부분 6개월의 속성과 출신으로,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통 가치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속성 과정으로 근대적 지식을 습득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며, 나아가 체계적인 교육 과정도 미흡했을 것이다. 가령 1901년 5월 23일자 『황성신문』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 공립 소학교 교원 김규원은 1899년 4회 속성과 졸업생으로, 『동몽선습』과 산술 등에 무지하여 지역민들이 학부에 그를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처럼 교사 임용의 평가 기준이 근대적 지식 내용으로 전환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1899년까지 지방 공립학교는 약 50여 개 정도로 졸업생 139명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학부에서 인허한 모든 학교에 교사가 파견된 것은 아니었고, 부교원으로 운영하던 학교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임용 제도는 우수한 교원을 확보하기보다 오히려 이들의 진출을 차단하는 구조였다. 이와 더불어 정규 기관에서 사범 교육을 받았던 교사들의 근무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특히, 교사들의 지방 학교 재임 기간은 매우 짧았다.

이에 교사들의 잦은 교체로 학생들과 지역민의 여론이 그리 좋지 않았 다고 한다. 물론 능력 있는 교사의 이임(移任)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그러나 공립학교에 임명된 상당수의 교사들이 근무를 기피하거나 부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학교 수업에 태만하여 지방민들이 교사의 교체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여러 문제는 공립학교가 견실한 교육 기관으로 출발하는 데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소학교에 지원된 매달 30원의 보조금은 교사의 월봉으로, 처우 보장과 공립학교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였다.173)이계형, 앞의 글, 1999, 215쪽. 월봉은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1897년 이후에는 20∼30원가량이었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여기에 부교원이 재직하면 인건비 지출이 늘어나므로, 학교의 재정 상황은 열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학부에서는 지역의 향교나 서원의 토지에서 자체 조달하도록 했으나, 지역 유생들의 반발뿐만 아니라 내장원(內藏院)에서 지세를 강제하는 사례까지 빈번하여 학교의 재원은 곤궁하기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지역 관리나 교원, 부교원의 착복이 불거지기도 하였다. 가령 조관중은 1897년 4월 한성사범학교 속성과의 우등 졸업생으로, 같은 해 9월에 김포군의 공립 소학교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수업에는 태만했고, 학부 보조금과 학생 퇴학비를 착복하여 고발되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당시 부교원 이의락이 조관중을 몰아내기 위해 꾸민 계략으로 밝혀지지만, 지방 학교 재원이 그만큼 불투명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평양 공립 소학교에서도 교원이 임명되기 전 부교원이 월급을 착복하였다. 이처럼 공립학교 운영에서 내외적 재정 문제는 지방 학교의 존립과 직결된 사안이었으나, 학부는 자체 해결을 강조할 뿐이었다.

부교원 제도는 지방 유림의 반대를 무마하고, 전통 학문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시도였다.174)정재걸, 앞의 글, 1995, 358쪽. 부교원 제도의 시행 배경은 사범학교의 졸업생만으로 지방 공립 소학교의 교육을 담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련한 제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념적으로는 ‘경본신참(經本新參)’에 따른 전통적인 교육과 신교육의 조화를 배경으로 하였다(정숭교, 앞의 글, 1998, 286쪽).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교원 임명 문제, 교원과 부교원의 마찰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부교원의 신분적 배타 의식은 여전히 사회 윤리로 온존하였다. 1900년 10월에 강릉의 유림은 다른 지방 사람을 공립학교 부교원으로 임명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남양 소학교 부교원 홍명후는 양반이라는 이유로 이교(吏校) 자식이 참여한 수업을 거부하였다. 이처럼 부교원은 사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국가의 교육 의지에 역행하는 자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학부에서는 부교원 제도를 적절히 활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교원의 월급은 매달 10원 정도로, 학부의 재정 지출은 교원에 비해 적었다. 게다가 ‘지역에서 학행(學行)이 있는 자’가 부교원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지역의 여론을 존중할 수 있어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증산 군수 김인식이 설립한 학교의 인허 과정에서 드러난다.

사립학교를 설립할 의도로 일군 유론(一郡儒論)을 넓게 수용하여 본군 명륜당을 중수하고 읍촌 영재를 받아들여 교육할 때 국한문 독서 작문하기를 주야불철(晝夜不撤)하니 이 이야기가 원근(遠近)에 전파하여 유지(有志)한 군자들이 흠앙불이(欽仰不已)하던 차에 …… 학부에서 듣고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해군 학교장(該郡學校長) 김익섭으로 부교원을 임차(任差)하고 공립 소학교를 특립(特立)하여 매월에 경비 은 30원씩을 지급하여 학비에 군졸함이 없으니 ……(『황성신문』 1899년 3월 9일자 잡보).

이 기사는 지방 군수가 중심이 되어 지역 유림과 결속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한 사례이다. 지역 유림이던 김익섭이 교장을 맡으며, 학교가 인근의 모범이 되자 학부에서는 공립으로 인허하였다. 그리고 교장 김익섭은 부교원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공립으로 전환하면 사립학교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국가에서 매달 30원씩 경비를 보조 받은 사실과 부교원의 임용이 그것이다. 따라서 공립으로 전환하면 지방 사립학교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을 충실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국가로서도 지역 유림과 마찰을 피하고, 30원의 보조금으로 교육 의지 를 펼쳐 나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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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관 임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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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원을 임명하는 것은 학부의 권한이었으나, 이들이 유교적 소양이 있는 지역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력은 정식 교원보다 한층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부교원들은 주로 한문(독서·작문)을 가르쳤기 때문에, 당시 교육 이념이 이들의 가치관과 크게 상치(相馳)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천자문』, 『동몽선습』 등 전통 교재를 중요한 교재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부교원 한 명만으로 운영하던 학교는 근대 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이 무색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75)“충청북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 교원 송순영씨가 학부에 보고하기를 …… 부교원 홍희춘만 있었는데 학도는 천자·동몽선습짜리 육칠 명만 오락가락 한즉 학교 경황이 말이 못된다고 하였더라.”(『제국신문』 1900년 11월 5일자 잡보)는 보도는 교원의 눈에 비친 부교원의 수업 실태를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이에 학부에서는 1904년 부교원을 대대적으로 해임하고 임명하는 방법으로 부교원을 직접 통제하려는 방안을 추진하였다.176)1904년은 부교원을 대대적으로 해임한 시기로, 이는 학부가 부교원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였다고 지적된다(김흥수, 앞의 글, 1994, 46∼47쪽). 이 시기에 3월 31일 무안항을 시작으로, 4월 11일에는 27개, 4월 14일에는 38개 학교의 부교원이 해임되었다. 이와 더불어 1906년 이후 부교원(부훈도)은 한성사범학교 임시 양성과 출신들이 단기 속성으로 교육 현장에 임용되었다. 그리고 일선 학교에서도 부교원을 사범학교 출신으로 보내줄 것을 기대하였다. 장련군의 공립 보통학교에서는 학교 부교원으로 “사범학교 졸업생으로 부교원을 속히 서임하야 보내라.”는 청원을 올렸다.

이 같은 사례는 이미 1903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신현정(申鉉鼎)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1903년 3월 경기도 관찰부 공립 소학교 부교원에 임용되었다. 임시 양성과가 설치된 이후부터는 학부의 부교원 임명이 더욱 늘어났다. 그 예로 양성과를 졸업한 박두성·신현정·윤상박은 각각 관립 양현동 보통학교·한성 공립학교·관립 안동 보통학교 부교원에 임용되었다.

이 밖에 근대 학교를 졸업한 인물들도 부교원에 임용되었다. 1904년 4월에 평양 일어 학교를 졸업한 박성규는 보통학교 부교원에, 1900년에 과천 공립 소학교를 졸업한 변각현은 1905년에 이 학교 부교원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통감부 설치 이전 근대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 부교원에 임명된 사실은 지방 세력을 우대한다는 본래의 취지가 변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1906년부터 임용된 부교원은 단기 과정을 마친 자들로, 교육 현장에서 일본인을 보조하는 교사로 대우 받았다.

사범학교 졸업자들이 공립 소학교 설치 지연 등으로 발령을 받지 못하자 임시 방안으로 강구된 것이 ‘명예 교사’ 제도였다. 그런데 이 제도는 한성사범학교 출신자들의 미발령을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1899년 한성사범학교 졸업생 엄성을(嚴星乙)은 사립학교 교사였다가 학부에 관립학교 명예 교사를 청원하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신문은 ‘관·사립 간 교육상 주의하는 명예’로 그의 행동을 치켜세웠다. 여기에서 명예 교사는 사립학교에 재직하면서 관립학교의 수업을 지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899년 한어 학교 학원이던 김완규가 수하동 소학교 학원을 교수하였는데, 당시 그가 명예 교사였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1908년 1월에 영유군의 신병균은 자기 집에 야학교를 설치하였는데, 숙정여학교의 명예 교사이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같은 해 9월 진명측량학교에는 권지중 등 2명의 명예 교사가 학도 80명을 교수하였다.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였던 박문소와 최명식은 ‘학교 재정이 군졸함을 걱정하여’ 월봉을 받지 않고 명예로 교수하였다. 이처럼 명예 교사는 존경과 예우에 대한 평가였다고 생각된다.

교사들은 1년에 한 번 승진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포상을 두 번 받으면 1등급 승진하는 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승진 외에도 포증을 내려 상여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포상은 관·공립과 사립학교 교사들이 교육하면서 점유성취(漸有成就)·학교성양(學校成樣) 등으로 성심하기 때문에 포장을 받을 만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당시 교사와 학생들이 각종 시험을 ‘교원의 근만과 학도의 우열을 점검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을 고려하면, 시험은 교사와 학생을 모두 평가하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특히, 학생의 진급·졸업 수효 3분의 1은 곧 교사의 승진이나 상벌의 기준이 되었다.

교사는 견책, 벌봉, 파면 등의 징계를 받았는데 학교 수업과 관련한 교사의 근무 태만이 대부분이었다. 견책은 지정된 개학일이 지나도록 수업에 임하지 않거나, 학생들의 진급이 극히 부족하거나, 교무에 불성실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때로는 학교 건물을 무단으로 확장·이전하여도 견책을 받았다. 벌봉(罰俸)은 일정한 기간을 설정하여 감봉하는 것을 말한다.

감봉일은 경중에 따라 10일, 14일, 15일, 1주일, 1개월, 2개월, 3개월 감봉으로 나뉘었다. 벌봉 사유는 견책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천이방학(擅離方學)·누일광직(屢日曠職)·매불래부(每不來部)·직무상 태만 등 교사의 처신에 대한 징계였다. 이 외에 학생이 퇴학당하면 벌봉을 받기도 했다. 파면은 교사의 지위를 박탈하는 징계였다. 징계 사유로는 학원폐공(學員廢工)·전폐교무(全廢校務)·전폐교과(全廢敎科)·학교에 부임하지 않는 사유 등 학교의 운영을 마비시킨 교사에게 내린 중징계였다. 그러나 면징계(免懲戒)되거나, 징계 수위도 일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사들을 독려할 만한 강제적 법 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통감부 설치 이후 보통학교 교사는 원칙적으로 한성사범학교 출신자들만 할 수 있었다. 교사는 본과·속성과·강습과·임시 양성과 등을 통해 배출되었는데, 이는 입학 자격·수업 연한·복무 내용·교과 내용·자격증 종류 등에 따라 달랐다. 한성사범학교가 폐교된 1911년까지 본과 졸업자는 총 52명에 지나지 않았다.177)김영우, 『한국 근대 교원 교육사』 I, 정민사, 1987, 114쪽. 이에 비해 3개월에서 1년의 단기 과정이었던 양성과는 122명, 강습과는 31명, 속성과는 118명이 배출되었다. 특히, 1906년 통감부 교육 정책의 일환이던 임시 양성과는 일본인 교사 임용에 따른 통역 요원을 교육하기 위해 두었는데, 이들은 일본인 교사의 눈과 손 이 되어 교육을 잠식하는 데 이용되었다. 학교 현장에는 일본인 교사들이 교감, 교원 등의 신분으로 일어를 통해 교육 내용을 통제하고, 실제 정책 당국의 교육 정책을 실현하는 전위대로 활약하였다.

한편, 이 시기 사립학교 교원은 매우 부족하였다. 수천 개에 달하는 학교의 교사 임명은 학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사립 사범학교나 임시 교사 양성소의 설치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일례로 기호흥학회는 ‘교사 소개소’를 마련하여 각 사립학교의 교원 부족을 해결하려 하였다. 사립학교는 교사를 사범학교, 사범과, 사범 속성과, 하기 사범 강습회, 사범 예비 강습회 등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양성하였으며, 양성 기간은 6개월에서 1년의 단기 속성 과정이었다.

사립학교에서는 각종 학회에서 추천한 지역 인물을 교사로 임용하였지만, 상당수의 사립학교에서는 여전히 교사가 부족하였다. 민족 독립과 국권 회복이라는 목표 의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데 사립학교의 소임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사범 교육의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거론되었다.178)『태극학보』 제26호, 1908년 11월 24일자 ;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 제8호, 1909년 12월 20일자. 가령 박은식(朴殷植)은 「사범 양성의 급무」라는 논설에서 사범 교육의 확대와 내실화를 역설하였다.

금일 교육 방침에 대하여 최선 급무는 사범 양성이라. 무릇 학생은 국가의 기초요. 몽학(蒙學)은 학생의 기초라. 몽학이 무(無)하면 완전한 학생이 무할 것이요. 완전한 학생이 무하면 어찌 완전한 국가가 유(有)하리오. 유시완전(惟是完全)한 몽학을 건립코자 할진데 필선 완전한 사범을 배양할지라 ……(『서우(西友)』 제5호, 1907년 4월 1일자 논설).

사범 교육은 소학 단계의 교사를 배양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사립 소학교가 많이 설립되자 자연히 교사의 수요는 높아만 갔다. 앞의 논설에서는 학회 차원에서 설립된 사범학교와 평양 관찰사였던 이시영(李始榮)이 설립 한 학교가 “각처(各處) 사숙(私塾)의 빙용(聘用)을 응(應)하게 하기로 규모(規模)가 개정(槪定)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밝혔다. 사범학교의 중요성은 언론에서도 강조하였다.

연칙(然則) 금일 교육의 급무는 사범 양성에 재(在)하니 학부는 국민 교육을 관할한 책임으로 약무의어교육칙이(若無意於敎育則己)이어니와 교육의 주의가 유(有)할진데 급급히 사범학교를 대위확장(大爲擴張)하여 축년사오천명(逐年四五千名)의 교사를 양성하여야 지방 각 학교의 청구를 가이(可以) 수응(酬應)할 것이오. …… 아동에게 외국 언어로써 선입(先入)의 학과를 작(作)하면 기(其)공부의 정도는 신속(迅速)키 불능이오. 자국의 정신은 방실키 심이(甚易)하리니 국민의 교육을 주관하여 문화를 도달케 하는지에 어찌 여차방침(如此方針)을 전용(專用)하리오. 모도왈교육교육(母徒曰敎育敎育)하고 제일 사범 양성을 급급(急急) 확장할지어다(『황성신문』 1908년 3월 19일자 논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논설은 사립학교에 필요한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사범 교육을 강조하고, 나아가 일본인 교사들이 전국의 관·공립학교에 배치되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보통학교 단계부터 일어를 보급하여 조선의 초등 교육을 잠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국의 정신을 배양할 수 있게 하는 교사 양성은 바로 ‘국민 교육’에서 급선무로 지적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취지로 사범학교의 설립은 이미 1905년부터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즉, 국민사범학교, 서우사범학교, 여자 사범학교를 비롯하여 평양·강서·진주·원산·광주·진위 등에 사범학교가 설립·운영되었다. 이들 사범학교는 국권 회복을 위한 교원 양성이 목적이었고, 학회·지역 인사들의 도움으로 재정적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다.

국민 보통교육의 기치를 내걸었던 갑오 교육 개혁은 문명 개화와 자주 적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기본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혁 주도 세력의 일관된 교육 정책과 국가적 교육 개혁 의지는 이념상의 목적과 실제 운영에서 상당한 괴리를 보였다. 결과적으로 교육 개혁은 일제 통감부 설치 이후 난국을 맞이하게 된다. 내외적인 문제가 중첩된 가운데 근대적 교육 개혁은 식민지적 기반 확립이라는 일본의 의도 아래에 응축되었던 것이다. 당시 교육의 기치는 개화와 문명 강국에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제국적 질서에 몸소 참여하는 모험적 시도를 감행하였다. 이 모험의 장은 조선을 ‘잠든 사회’로, 서구를 ‘근대화된 부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근대화라는 가치를 척도로 하여 전통을 단죄하고, 근대를 미화해 나갔다는 점이 사회 지도자들의 삶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이는 바로 일본이 외압을 통해 조선을 접수한 근거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는 엄연히 경제력·정치력·문화력·군사력이 결부된 모험의 장이다. 100년 전 개혁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제국 질서는 말 그대로 각 나라 ‘국세(國勢)’의 연장이었다. 국가의 부강과 민족자존, 독립이라는 ‘개화 프로젝트’는 사회적 동의를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했던 현실을 심사하지 못했다. 100년 우리 역사는 당면한 문제에 사회 갈등이라는 내적 변수를 부정하고, 외적인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풀어가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압의 실질적인 위치를 점한 일본은 강대한 무력을 등에 업고 조선의 미래를 담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오늘날 교육의 고전적 정의인 ‘문화의 전달’이라는 용어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현재의 교육은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판결되고 있다. 여기에는 경쟁에서 승리한 자를 위한 밝은 미래만 기대되고, 그렇게 교육받고 있다. 사실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엄청난 문화적 괴리와 사회적 혼란과 이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의 현실적 개혁 의식과 개화 의지 자체가 우리의 근대적 정신의 성적표인지도 모른다.

문화는 국경도 없고, 국가의 정체성도 없애는 상징적 권력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투쟁으로 진화하게 된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앞으로 가기도 힘든 이때, 돌아보기에 100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멀다. 어찌 보면 지난 과거를 추억으로만 상기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평가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지금 당장의 권력 투쟁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전통이 앞으로의 부딪힘보다 더욱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추억으로만 되새김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엄연히 우리의 현실을 꾸몄던 역사였고,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치 판단의 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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