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4장 일제강점기의 배움과 가르침
  • 2. 식민지 교육의 현황
  • 보통학교 증설 운동
김태완

교육에 대한 조선인의 행동은 3·1운동을 기점으로 크게 변하였다. 3·1운동 이후 조선인은 일제가 설립한 보통학교에 취학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에서 적극적으로 그 교육 기회를 획득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심지어는 유교 학자와 양반들까지 보통학교 진학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높은 교육열로 입학 지원자가 모집 인원을 초과하게 되어 보통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입학 지원자의 급증은 1930년대에 들어서는 ‘입학 전쟁’이라고까지 표현될 정도로 경쟁이 격화되었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1910년대) 집집마다 선생이 다니면서 면서기 모양으로 학령 아동을 데려다가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 …… 세상이 그만 뒤집혀서 점점 세상사가 이악화(利惡化)하게 되고 보니 이제 와서 학교 하나 넣기가 하늘의 구름 잡기보다도 더 어렵게 되었다. 자식을 낳아서 이놈을 공부시킬 만큼 돈을 벌어야겠다고 염려하는 것보다도 먼저 요놈을 어떻게 학교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말하자면 재정 문제보다 입격(入格) 문제가 앞을 서게 된 것이다.182)이영수, 「학교는 눈물인가? 한숨일런가?」, 『신동아』, 1936년 6월, 18∼19쪽.

이러한 보통학교 부족 사태는 일제가 교육 기회를 제한하는 의도로 보여 정치·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초기에 총독부는 조선인의 기금 조성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금년 사월에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아해들에게 입학시험을 뵈인 사실은 비단 경성분 안이라 디방에서도 거개 그리한 모양임으로 이와 갓치 보통학교 초학 아동에게 시험을 뵈임은 교육계에 놀날 만한 큰 사건임으로 …… 장차 엇던 방침으로 이와 갓치 크고 어려운 문뎨를 해결하랴느냐 혹 엇더할 방침을 임이 정함이 잇느냐 업느냐 무른즉 …… 지금 경성 시내에 십여 개소나 되는 보통학교가 모다 퇴락되얏슴으로 이것만 개축하랴 하야도 막대한 금액이 걸닐 터인대 부의 예산으로는 물론 엉터리도 업고 도텽의 디방비로 할 수가 업스며 국고 보조를 밧을 수도 업는 형편이니 …… 이는 일반 시민이 얼마던지 분발하야 부담치 안이하면 아니 될 것이오. 이번에 초학 아동에게 시험 뵈인 것도 별수 업시 교실에 부족하야 그리된 것이오. 이와 갓치 부족한 교실을 늘리랴면 아모리 하야도 여러분이 분발하야 당국쟈와 힘을 합하지 안이하면 안이 될 것이다.”고 한다.183)『동아일보』 1920년 4월 13일자.

보통학교 취학 경쟁이 본격화되자 조선인의 교육 행위는 개별적으로 자녀를 보통학교에 취학시키려는 입학 경쟁의 수준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결집하여 보통학교를 설립한다거나 학급을 증설하는 등의 ‘운동’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부터 조선인은 부락 단위로 기금을 조성하여 보통학교를 거주 지역에 설립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는 1930년대에 총독부의 ‘일면일교제(一面一校制)’ 정책과 맞물려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보통학교 설립 운동은 면 사람들이 협력하여 4년제 보통학교를 신설하 려는 운동으로, 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여 총독부에 보통학교 설립 인가를 신청한 뒤에 도 지방비나 총독부의 국고에서 보조금을 일부 받아 설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보통학교 설립 운동은 총독부의 강제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적극적인 요구에서 출발하여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전개하였다.

또 새로운 보통학교의 신설뿐만 아니라 이전에 선교사나 면 사람들이 설립한 각종 사립학교를 보통학교로 승격시키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는 사립학교의 재정 문제가 심각하였고 제도적으로 사립학교 졸업생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는 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년제 보통학교를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6년제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런 운동에 대해 총독부는 부정적이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한 보통학교 증설 정책에서도 총독부는 이러한 관점을 굳게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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