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4장 일제강점기의 배움과 가르침
  • 2. 식민지 교육의 현황
  • 식민지 교육의 민족 차별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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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노 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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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벌어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적인 교육 실태를 살펴보면, 취학 절대 인구는 조선인이 훨씬 많았지만 당시 조선 안에 있던 일본인 비중은 1941년이 되어서도 조선인의 2.9%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대적 수치를 비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초등 교육의 경우 취학률이 가장 높았던 1942년에 인구 1만 명당 조선인 취학 학생은 697명 정도였지만, 일본인은 1,379명이었다. 이러한 차별적 불균형은 중·고등 교육으로 갈수록 훨씬 심화되었다. 중등 교육의 경우 1942년 조선인 취학생은 인구 1만 명당 33.7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인 취학생은 520명에 달하였고, 고등 교육의 경우 1942년 조선인 취학생은 인구 1만 명당 1.8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인 취학생은 46명이었다.

일본인과 불균형이 가장 덜했던 초등 교육도 조선인의 보통학교 증설 운동으로 양적으로는 기회가 많았지만, 교육의 질적인 측면이나 학교의 물적 측면의 차별은 훨씬 심하였다.

표 ‘공립 초등학교 한국인·일본인 교육 조건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육 조건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인 학교의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데 반해 일본인 학교는 그다지 증가하지 않는다. 또한, 조선인 학교의 학생 1인당 경비는 줄어들고, 일본인 학교는 크게 늘어났다.

<표> 공립 초등학교 한국인·일본인 교육 조건 비교
항목 단위 1921년 1931년 1941년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학교 수 755 419 1,860 467 2,973 524
학급 수 3,087 1,218 8,780 1,774 20,550 2,530
교사 수 3,826 1,499 9,338 2,105 20,557 2,827
남학생 수 134,719 24,807 370,661 36,648 1,076,364 52,143
여학생 수 17,586 22,426 76,928 33,570 427,454 46,576
학교 경비 8,882,931 3,094,516 13,058,822 3,812,694 46,396,706 8,111,992
부지 및 부속지 3,039,868 684,212 6,996,430 733,906 17,534,233 2,215,735
교장, 기타 건물 166,017 73,343 681,607 135,680 2,181,096 282,840
도서 335,490 119,130 1,058,862 359,056 3,132,829 618,698
기계 표본 233,946 190,619 1,458,540 513,646 3,105,876 889,684
기구 782,425 380,051 4,026,095 885,218 9,380,411 1,602,424
자산 총액 9,114,285 5,043,613 36,887,872 9,883,886 104,261,126 23,775,985
교사 1인당 학생 수 39.8 31.5 47.9 33.3 73.1 34.9
학생 1인당 경비 57.9 65.5 29.1 54.2 30.8 82.1
학생 1인당 자산 59.8 106.7 82.4 140.7 69.3 230.8
*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 1932·1941.

식민지 교육에서 민족 차별은 이와 같이 물적·제도적 차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모집 비율, 선발 방식, 사상 검열 등을 통해 조선인을 차별한 것도 큰 문제였다. 『동아일보』는 전문학교 교장 사이 에 불문율 같은 내규가 있어 일본에서 건너오는 학생들에게 정원의 50%를 제공하고, 나머지 50%로 조선에 있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수용하기 때문에 고등 교육 기관에서 조선인의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였고, 잡지 『조광(朝光)』은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일정한 비율로 많이 선발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민족 차별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또 1930년대 후반에 경성 제일 고보 교장은 경성 제국 대학 예과를 비롯한 각 학교가 학생을 성적 이외의 요소로 차별하여 선발하는 것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또 실제 고등 교육 기관에서 행하는 선발 방식이 조선인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선발 과목에 일본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 과목을 일본어로 시험 보았기 때문에 일본인에 비해서 매우 불리하였다.

이러한 차별과 더불어 학생의 사상을 검열하여 민족 의식이 투철한 학생은 진학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경성 제국 대학 예과의 선발 과정은 명표 외에 호적 등본과 사진, 입학 검정료, 소견표(所見表)를 제출하게 되어 있는데, 소견표는 출신 학교장이 직접 총독부 안에 있던 예과 개설 사무소로 발송하였다. 하지만 당시 학교장은 모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민족 의식이 투철한 학생은 합격할 수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경성 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라고 비판하면서 6·10 만세 운동 관련 학생이 대부분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단계에 걸친 교육적 차별은 일제가 내세운 일시동인이나 내선일체의 이데올로기가 허구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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