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2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제4장 일제강점기의 배움과 가르침
  • 3. 학교 생활
  • 입학과 졸업
김태완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는 4월 5일에 입학식을 하고 1년 교육을 시작하였다. 1학기 종업식은 7월 20일이었으며, 8월 20일까지 한 달 동안이 하계 휴업일(여름 방학)이었다. 2학기는 8월 21일부터 12월 24일까지이고, 1월 14일까지 약 20일 동안이 동계 휴업일(겨울 방학)이었다. 3학기는 1월 15일부터 3월 22일까지 진행되었고, 이후 다음 입학식까지는 학년 말 휴업일(봄 방학)이었다.

1920년대에 보통학교의 입학자가 모집자를 항상 초과하면서 보통학교에 입학시험이 시작되었다. 우선 보통학교 입학 자격에 관해서는 보통학교 규정(1934년) 제72조에 “연령이 매년 4월 1일에 만 6세에 달하지 못한 아동은 입학할 수 없다.”고 하여 입학 연령상의 하한 규정만 있었다. 만 6세부터 몇 세까지의 아동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할 것인지는 지역별로 학교장 회의에서 결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보통학교 입학 선발 방법은 학교장이 재량으로 결정하는데, 대체로 구술 고사와 서류 심사를 하였다. 구술 고사는 교사가 아동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 여부에 따라 합격 여부를 판정하였다.

상식적인 것을 묻습니다. 예하면 성명, 주소, 부모의 성명과 연령 등으로부터 우마(牛馬)의 구별, 그림을 그려서 국기의 이름과 국기 게양의 날 등을 묻거나 조금 힘든 것으로서 뿔 없는 소를 그리고 무엇이 부족한가, 또는 뿔 있는 말을 그리고 무엇이 더 있는가 등을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모두 만점으로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면 입학됩니다. 이는 실없는 말입니다만 이만큼 보교(普校) 입학시험은 힘듭니다(1938년 경성 교동 공립 보통학교).184)『동아일보』 1938년 2월 4일자.

질문 내용은 기본적인 학습 능력과 발표력, 학업 적성을 확인하는 초보적인 지능 검사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러한 보통학교 시험에 대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평가 방식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또 보통학교 입학시험이 때로는 아동의 사회 경제적 배경에 따라 교육 기회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즉, 가정환경이 좋은 아동만 알 수 있는 재료를 입학시험에 이용하거나, 특정한 아동을 부정 입학시키거나, 별도의 입학금과 기부금 또는 수업료를 미리 내라고 요구하는 방식으로 입학을 시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중등학교의 학생 선발은 일반적으로 일본어와 산술 과목의 필답 고사와 보통학교 교장의 소견표와 재산 조사 등을 통한 서류 심사 그리고 면접으로 이루어졌다. 재산 조사를 하는 것은 중등학교의 교육비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필답 고사는 학교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일본어 시험은 주로 단답형 기술식 문항으로 되어 있었고, 일본어 발음 능력, 작문 능력, 독해 능력 등을 묻는 것이었다. 산수 문제는 초보적인 산술 문제 해법과 고도의 응용문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필답 고사를 보아 중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보통학교에서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을 기른 학생들이었다.

학생 선발에서 입학시험과 더불어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재산 정도였다. 즉, 학생은 보통학교부터 수업료를 냈는데,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록 액수가 커 부모의 재산 정도가 입학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보통학교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매달 월사금으로 60∼80전의 교육비를 지출해야 하였다. 이는 거의 쌀 4∼5되 값, 좁쌀 한 말 값, 소주 3∼4병 값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시 서당의 수업료가 1년에 4원이었기에 보통학교의 수업료는 그것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여기에 더하여 학용품 값이나 통학료 등을 더하면 자녀 한 명을 교육하는 데 드는 비용은 부유한 농민의 자녀의 경우 수업료와 책값, 기타 학용품비를 통틀어 15원 80전 정도였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7원이었으니 학생 한 명을 보통학교에 취학시키는데 1년에 약 쌀 한 가마 정도의 교육비가 든 것이다.

당시 보통학교 교육비는 비록 중간 농민 이상에서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실제로 농촌 보통학교 학생의 대부분은 빈곤한 농민층이었다. 이로써 당시 조선인의 교육열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 보통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월수입이 30원가량인 도시 상층 노동자는 자녀를 두 명 정도 보통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주거 조건조차 갖추지 못한 도시 최하층 가정의 상당수가 자녀를 보통학교에 진학시켰다.

중등학교 선발 과정에서는 부모의 재산 정도가 더욱 중요하였다. 실제로 자녀를 중등학교에 입학시키려면 월 생활비가 도시의 경우 70원 이상, 농촌의 경우 중농 이상 재산가는 되어야 했다.

보통학교 입학 시에는 그리 많은 비용도 들지 아니하거니와 중등학교에 입학함에는 100원 내외의 일시금을 요하게 된다. 입학 후에도 학년마다, 학년이 높아갈수록 체증적으로 불소(不少)한 입비가 있다. 입학금과 월사금은 부득이한 것이라 하드라도 교과서도 차치하고라도 매년 12원 정도의 수학여행비, 교우회비, 제복, 제모, 유도, 검도복비, 운동복, 운동모비, 어떤 학교에서는 스케이트비 등. 게다가 야구나 정구를 하랴는 그 기구비. 이러 한 비용들은 유족한 상공 계급에게는 근소한 액일는지는 모르거니와 가천(價淺)한 농산물을 유일한 부로 아는 농민에게는 거의 과중한 부담이다. 스케이트 일개가(一個價)가 그것을 신는 학생의 부친의 20일간 노동에 치(値)한다는 것이 사실이다.185)『동아일보』 1931년 3월 3일자 사설.

<표> 경성 제이 공립 고등 보통학교 입학시험 문제
제1일 1교시(20분)
다음의 문제를 푸시오.
……
(4)
다음 복비례식을 푸시오.
3.5㎞ : 1.6㎞
8시 : 15시 = 7일 : (  )일
6원 : 2.25원
(5) ……
제1일 2교시(50분)
……
(7) 조선의 우편 저금은 연 3.12%의 이율로서 15일까지의 예금에는 그 달분의 이자를 붙이고 16일 이후의 것에는 붙이지 않으며, 또 정산하는 1월달도 이자를 붙이지 않는다. 일금 150원을 4월초 우편 저금에 넣어 10월에 인출하면 이자는 얼마인가?
제2일
……
(10) 1초에 75미터를 나르는 비행기와 1시간에 72킬로를 가는 기차의 속도의 비를 구하라.
✽『동아일보』 1938년 3월 13일자와 17일자.

그렇기 때문에 중등학교 입학 지원 서류에 학부모의 납세 증명서를 첨부하게 하였고, 이것이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입학하기 위하여 갖가지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세금을 더 내려 하거나 심지어 납세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세액을 확보하기 위하여 흩어져 있던 가족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현상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도 정규 과정을 마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졸업생 수가 적었던 이유는 첫째, 학사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학년에 두 번 낙제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퇴학시켰다. 둘째, 경제적인 이유로 중퇴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는 일본의 경제 공황이 만성화된 시기인데다가 1926년에 세계 경제 공황까지 일어남으로써 경제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에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들이 속출하였다. 셋째로 6·10만세운동, 3·1운동, 1927년의 동맹 휴업, 광주학생운동 등과 관련하여 희생된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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