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1. 상인과 정치 권력의 관계
이욱

상인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 오랜 세월, 상인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다양하고도 세련된 방법을 고안하였다. 상품 가치를 알리는 현란한 광고,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정교한 부기법(簿記法)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묘하게 포장된 상행위라도 그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노련한 상인이든 전혀 소질이 없는 초보 상인이든 간에 장사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물건을 싸게 구입하여 비싼 값에 파는 방법으로 이윤을 얻는다.

뛰어난 상술(商術)이란 결국 하찮은 것을 귀하게 포장하여 비싸게 파는 재주이다. 개성 상인의 뛰어난 상술을 들먹일 때 자주 드는 예가 “길바닥에 널린 개똥도 개성 상인 손에 들어가면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봉이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파는가 하면 닭을 봉황이라고 속여 아주 비싼 값에 팔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상품 가치는 본질 가치가 아니라 시장 가치이다. 물이나 공기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본질 가치를 지니지만 너무 흔해서 시장 가치, 즉 상품 가치가 없다. 상품에는 반드시 구매자가 필요하고, 상품에 비해 구매자가 많을수록 비싸게 팔 수 있다. 완벽한 자급자족 사회라면 사고파는 상품이 없을 것이고, 당연히 상인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구매자에 비해 상인이 더 많으면 상인들끼리 경쟁하게 된다. 상인들은 구매자를 자기 쪽으로 끌기 위해 다른 상인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게 마련인데, 대개는 품질을 높이거나 가격을 낮추는 방식을 취한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는 품질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가격을 낮춰 많이 파는 방식인 박리다매(薄利多賣)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많은 상인이 경쟁적으로 박리다매를 하게 되면 가격 인하는 연쇄 작용을 일으켜 마침내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의 거짓말’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때 경쟁자들이 출혈을 견디지 못하고 일찌감치 파산(破産)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본력이 비슷한 상인들끼리 경쟁이 붙어 출혈 판매가 지속되면 모두 망할 수도 있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상인은 수요(구매자)가 많을수록, 공급(경쟁자)이 적을수록 유리하다. 그래서 상인이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독과점(獨寡占)을 꿈꾸게 마련이다. 상인은 대개 권력과 결탁함으로써 독과점 특혜를 누리려고 하였다. 물론 『허생전(許生傳)』의 허생처럼 대자본으로 일부 품목을 독점하여 판매할 수도 있지만, 워낙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위험이 커서 그럴 수 있는 상인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쉽고도 안전한 방법이 권력과 결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권력과 밀착하여 유리한 영업 환경과 독점권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특히 거상일수록 권력 지향성이 강했다. 이는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불리는 평안도 농민 전쟁에서 잘 드러난다. 중소 상인들은 주로 홍경래 측에 가담한 반면 거상들은 대개 진압군 측에 가담하였다. 소설 『상도(商道)』로 널리 알려진 의주의 거상 임상옥(林尙沃)도 진압군 측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물론 중국의 경우 거상들과 국가 권력이 충돌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독점 상인 구실을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소금, 철, 차 같은 구매력이 큰 상품을 전매하여 이를 국가 재정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소 금은 매우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밀매 조직이 성행하였고, 그 이익을 잃지 않기 위해 국가 권력과 정면 대결도 서슴지 않았다.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이나 홍건적(紅巾賊)의 난 같은 대규모 민중 반란의 배후에는 소금 전매권을 둘러싼 국가 권력과 소금 밀매상의 충돌이 있었다. 심지어 이러한 충돌의 여파로 국가가 망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소금 전매제가 시행되지 못하였다. 국가 재정이 궁핍해질 때마다 소금 전매제 시행이 논의되기는 하였지만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당당한 국가에서 백성과 사소한 이익을 다툴 수 없다(與民爭利)는 논리가 효율적인 재정 확보책을 압도하였다. 국가 권력과 거상 사이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품 경제가 발전할수록 국가 권력과 밀착된 상인의 폭이 넓어졌다.

이 글에서는 국가 권력과 상인의 관계를 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독점권을 보장받은 상인들이 있었겠지만, 사료(史料)가 많지 않아서 구체적인 실상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게 세 부류의 상인을 축으로 국가 권력과 상인의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는 일종의 어용 상인(御用商人)이던 시전 상인이다. 이들은 국가 권력의 필요에 따라 독점 상인으로 지정되었다. 두 번째는 경강 상인이다. 이들의 경우 국가 권력과 상인 모두의 필요에 따라 결탁하였지만, 결국 국가 권력보다는 이를 빙자한 사적인 권력과의 결탁으로 귀결된다. 마지막은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엄밀하게 말해 거상(巨商)은 아니다. 그러나 보부상들은 개항 이후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과 친해지려 했고 권력에 협력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 상인군(商人群)을 통해 조선시대 권력과 상인의 관계를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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