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2. 조선의 상업 정책과 시전 상인
  • 조선 후기 시전 상인과 권력의 결탁
이욱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성 안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 전체 인구가 증가한 탓도 있지만, 흉년 등으로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아 도성으로 유입되는 인구가 크게 증가한 때문이었다. 이렇게 한양으로 유입된 인구 중 상당수는 상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관리들이 한양의 인구 증가 현상을 염려한 것 가운데 하나가 ‘축말(逐末)’, 즉 농민들이 본업을 버리고 상업에 투신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도성 근방에서 심각하여, 토지 소유자도 토지를 팔아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 주고 자신은 한양으로 와서 상업에 투신하는 일이 많았다. 임진왜란 이후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게다가 전쟁의 여파로 시전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공백 상태가 되자 그 틈을 타서 한양에서 상업을 하는 상인이 증가하였다. 이른바 난전(亂廛) 상인이 늘어난 것이었다.

난전 상인은 시전 상인이 지던 시역 부담 없이 자유롭게 상업에 종사했으므로 그만큼 시전 상인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시전 상인은 당연히 이들을 한양에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재정이 악화되자 그 부담의 일부를 시전 상인에게 전가하였다. 조선 전기에 시전 상인이 지던 부담보다 훨씬 과중한 부담이 주어졌다. 국가 재정 충당에서 시전 상인의 소임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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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전
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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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 상인으로서는 경쟁 상인을 배제할 수 있는 독점 영업권이 필요하였고, 조선 정부로서는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시전 상인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양자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서로 이익이 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것이 ‘금난전권(禁亂廛權)’이었다. 정부는 시전에 소속되지 않은 상인의 활동을 금지하고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인정함으로써 시전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처음에는 9개 시전은 한성부에서 직접 난전 상인을 단속하였고, 그 밖의 5개 시전은 시전 상인이 직접 난전 상인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때 금난전권을 받은 14개 시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전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이때에는 시전이 독점권을 갖는 품목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다만 해당 시전에서 주로 판매하는 품목을 보호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시전에 금난전권이 주어지면서 한양의 빈민이나 인근의 영세농 등 소소한 상품을 매매하는 소상인의 독자적인 난전 활동은 위축되었다. 반면 어느 정도 규모의 자본을 가지고 있으며 봉건 권력과 결탁한 자들이 난전 상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은 주로 군문(軍門)의 군졸이나 권세가의 노복(奴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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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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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군졸이나 권세가 노복의 난전 활동은 소속 군영(軍營) 대장이나 권세가의 비호를 받았다. 시전 상인들이 이들 군졸들의 난전을 단속하다가 오히려 군영에 잡혀가 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군영에서 그들의 난전 행위를 비호한 것은 이윤의 상당 부분이 군문의 고위 관료에게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난전 상인과 군영의 결탁 관계는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빌미가 되었다. 예를 들어 정조 초년의 정국 변동 과정에서 구 선복(具善復), 장지항(張志恒), 이장오(李章吾) 등 영조 연간에 주요 군문 대장을 역임한 사람들이 정치적 숙청을 당했는데, 주로 자신이나 노복의 부정한 상업 행위가 빌미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난전은 어디까지나 불법이었으므로 권력으로 시전의 금난전권을 저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권력층에게도 정치적인 부담이 되었다. 그러므로 군졸이나 궁방 세가(宮房勢家)의 노복들은 상행위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새로운 시전을 만들어 시전 상인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상품 경제의 진전에 따라 새로운 상품이 생겨남으로써 시전의 창설이 명분상으로나 실질상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아울러 정부의 재정 악화도 원인의 하나였다.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 방안의 하나로 상업 이윤을 활용하려 하였다. 그 방안은 난전 상인을 시전 체제 내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는데, 개별적이면서도 유동적으로 상업 활동을 하는 난전 상인에게 정부가 일일이 수세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시전이 아닌 난전에게 수세하여 그들의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곤란한 일이었다. 또한 기존 시전의 반발을 막아낼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일정한 재정 부담을 조건으로 새로운 시전의 창설을 허용하였다. 금난전권도 처음의 14개 시전에서 모든 시전으로 확대 적용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전반에는 도성 안에 한정되어 있던 시전이 도성 밖, 나아가서는 한강 연안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쌀이나 어물 같은 일용 필수품은 도성 안팎으로 시전이 몇 개나 생겼다. 어물전의 경우는 내어물전과 외어물전, 싸전의 경우는 상미전, 하미전, 문외미전, 서강미전, 마포미전 등이 있었다.

이처럼 시전과 난전 사이의 경쟁 그리고 동일한 품목을 다루는 시전 사이의 경쟁이 심해지자 자연스럽게 상인과 권력자 사이의 결탁이나 유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우선 시전과 난전, 특히 군졸 난전의 경쟁에서 권력과 결탁 또는 청탁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숙종 연간의 윤휴(尹鑴)였는데, 그는 시전 상인의 청탁을 받아 공식 석상에서 군졸들의 상업 활동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였다.3)『숙종실록』 권4, 숙종 원년 윤5월 정유.

또 시전 상호 경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예가 숙종 연간에 생긴 외어물전과 내어물전 사이의 분쟁이었다. 도성 안에 있던 내어물전은 자신들이 원조임을 내세우는 한편, 일물양시(一物兩市) 즉 상품 하나에 시전이 두 개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집요할 정도로 외어물전을 혁파하려 하였다. 이러한 두 어물전의 분쟁 과정에 권력자들이 개입하였다. 특히 후발 시전인 외어물전은 권력의 비호가 없이는 내어물전의 혁파 논리를 이겨낼 명분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시 실세인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등 여흥 민씨 집안과 결탁하였고, 그들의 비호를 받아 시전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 결탁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지나치게 행사하자 한양의 상품 유통이 차질을 빚는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 정부에서 시전 상인에게 금난전권을 준 것은 정부가 장악할 수 있는 상인들을 통해 한양의 물자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 오히려 한양의 원활한 물자 유통에 장애가 되었다. 이에 정부 내부에서 시전의 금난전권을 일부 완화하거나 혁파하려는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누구나 자유롭게 상품을 사고팔 수 있게 하자는 통공 정책(通共政策) 시행을 주장한 것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는 국왕도 시전 상인에 우호적이었다. 1755년 영조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자는 주장에, 시전 상인은 한양의 근본이 되는 백성인 반면 난전 상인은 세력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무뢰배들이므로 통공 정책을 시행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1764년에는 “시전 상인도 나의 백성이요, 난전 상인도 나의 백성이다.” 라는 이유를 들어 통공 정책 시행에 동의하였다.4)『영조실록』 권104, 영조 40년 11월 임자. 그리하여 1764년 육의전 등 시전 몇 개를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는 통공 정책이 최초로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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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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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도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하기 전까지 두 차례 더 통공 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통공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물론 이때 시행된 통공 정책이 흉년을 맞아 한양의 원활한 물자 유통을 위한 임시 조치였다는 이유도 있지만, 시전 상인의 청탁을 받은 정치 세력의 지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홍인한(洪麟漢)이었다. 그는 1768년(영조 44) 시행된 통공 정책 혁파에 적극적이었고, 시전 상인과 군졸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을 때도 시전 상인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5)『승정원일기』 1287책, 영조 44년 12월 14일. 정조가 즉위한 초년에는 시전 상인에게 투자하거나 공인권(貢人權) 같은 이권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해통공의 시행 배경도 노론 세력과 시전의 결탁이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며, 1794년(정조 18) 남인 계열인 이석하(李錫夏)는 상소를 올려, 홍인한과 같은 정치적 태도를 취한 세력이 시전 상인과 결탁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전 상인들은 한양의 상품 유통 독점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과 결탁하거나 유착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합리적 경영이나 정상적인 거래보다는 독점권에 의지한 시전 상업은 점차 도전자들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특히, 한강 연변에서 성장한 경강(京江) 상인들은 한양 도성 안의 중소 상인과 외곽의 장시, 지방의 상인들과 결탁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시전 상인을 밀어내고 한양의 상품 유통권을 장악하였다. 조선 정부도 시전 상인을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포기하고 새롭게 성장한 경강 상인을 새로운 상업 세력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이 1791년에 시행된 신해통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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