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3. 경강 상인의 성장과 정경 유착
  • 주교사 설치와 쌀 폭동
  • 경강 상인의 도고 상업 전개와 배경
이욱

원래 한양의 상품 유통 구조는 시전을 정점으로 하였다. 즉, 지방에서 물건을 매입하여 한양으로 싣고 온 선상이나 향상은 일단 그것을 경강 연변 에 있는 여객 주인에게 넘겼다. 그러면 여객 주인은 그것을 처분하기 위해 도성 안에 있는 시전이나 경강 연변에 설치된 시전 상인들을 불러들여 상품을 보여 주고 거래를 주선하였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면 시전 상인은 그것을 자신의 점포로 가져가서 일반 소매상이나 소비자에게 전매하였다. 즉, 한양에 반입된 상품은 반드시 선상(향상) → 여객 주인 → 시전 상인 → 중도아 → 소비자의 단계를 통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여객 주인이나 중도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객 주인권이 강화되면서 반드시 여객 주인에게 전매하도록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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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상품 유통 과정
한양의 상품 유통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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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여객 주인이란 한양의 이러한 상품 유통 구조에서 시전의 상업 기능을 보조하기 위한 존재였다. 즉, 한양의 상업 구역이 확장되고 반입 물량이 증대하면서 시전 상인들은 모든 상품을 자신들이 일일이 거래하기 힘들어지자 상품의 매집(買集) 기능을 맡도록 중간 상인을 두었는데 이들이 여객 주인이고, 분산 기능을 일부 떼어준 것이 중도아(中都兒)였다. 시전 상인은 이러한 여객 주인과 중도아를 하부에 두어 한양으로 반입되는 상품을 매집하고 분산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러한 시전 상인의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금난전권을 시전 상인에게 주었고, 또 한양 근처 100리 이내에는 장시를 열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시전 상인들은 이러한 권리를 함부로 남용하였다. 향상이 상품을 가져왔다고 여객 주인이 시전 상인에게 기별을 보내면, 그들은 한껏 배짱을 부리며 헐값에 사들이려고 하였다. 이는 반드시 시전을 통해서만 한양에 상품을 판매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악용한 것이다. 또 경강 상인이나 여객 주인으로 서는 아무리 그들에게 팔고 싶지 않더라도 한양 주변에 달리 판매할 만한 유통 구조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전매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여객 주인이나 경강 선상이 상업을 통한 이윤을 확대하려면 시전 상인을 유통 구조에서 배제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양으로 반입되는 상품을 반드시 시전에 넘기도록 하는 규정을 철폐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규정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이 곧 여객 주인으로 정착한 경강 상인이 발전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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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장날
한양의 장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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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강 상인이 시전 상인을 배제하고 한양의 유통 구조를 장악, 도고 상업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우선 한양과 그 주변 장시의 성장을 들 수 있다.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한양은 전국적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한양은 명실상부한 전국적 상품의 집산지였다. 예를 들어 추향(秋香)이라 불리던 황주 봉산의 배, 월화(月華)라 불리던 경기도 안산의 감, 울릉도에서 생산되던 울릉도(鬱陵桃) 등이 모두 한양으로 반입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 상품도 한양에서 판매되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를 보면, “부유한 장사치가 되면 앉아서 상품을 파는데 남으로는 일본과 통하고 북으로는 연경(燕京)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수출입해서 재산이 수백만에 이른 자도 있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이렇게 한양의 물자 반입이 활성화되자 한양 내부에 새로운 장들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한양의 전통적인 시장이었던 종루(鐘樓)와 함께 지금의 염천교 부근인 칠패(七牌)와 지금의 광장 시장 부근인 이현(梨峴)에 새로운 시장이 성장하여, 종로와 규모가 비슷해졌다. 특히 칠패에서 거래하는 어물의 양은 시전의 10배에 달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아울러 한양 외곽에 새로운 상품 유통의 거점도 생겨났다. 광주의 송파장과 양주의 누원장(지금의 의정부시 호원동 부근)이 바로 그것으로, 이 두 지역은 한성부 관할이 아니었으며,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행사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난전 상인들은 누원과 송파장을 직접 연결하여 상품을 한양을 거치지 않고 동북 지역과 삼남 지역으로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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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 등장(市廛等狀)
시전 등장(市廛等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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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한양 내·외부 장시의 성숙을 활용하여 여객 주인들은 한양의 상품 유통에서 시전 상인을 배제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에서 상품을 싣고 오는 선상(향상)은 반드시 자기와 주인 관계를 맺은 여객 주인에게만 물건을 전매하였다. 물건을 넘겨받은 여객 주인은 시전 상인을 부르지 않고 성안에 있는 중도아나 한양 밖 송파나 다락원에 있는 상인들을 불러 은밀히 물건을 유통시켰다. 중도아들은 이렇게 구입한 물건과 시전에서 구입한 소량을 섞어서 한양에 유통시켰다. 행상 역시 시전보다는 상품 공급권을 쥐고 있는 여객 주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즉, 한양에서 행상을 하는 자들도 여객 주인의 지휘에 따라 상품을 팔러 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여객 주인의 자본력과 조직망, 거기에 중도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도아는 특히 주목해야 할 상인이었다. 중도아는 시전에서 매집한 상품을 소매상이나 소비자에게 전매하던 상인이었다. 신해통공 이전까지 한양에 반입되는 상품은 반드시 시전의 중개를 통해 소비자에게 팔리도록 규정하였다.

그런데 한양에 반입되는 물량이 많아지면서 시전 상인이 상품의 매집과 분산을 전담할 수 없었다. 특히 생선처럼 부패하기 쉬워서 빠른 시일에 유통되지 않으면 상품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상품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시전 상인은 어물의 효과적인 산매(散賣)를 위해 중도아를 두었다. 중도아는 당초에는 시전에 예속된 일종의 하청 상인과 같은 존재였다. 중도아 가운데는 자본 규모가 작아 직접 행상을 하는 자들도 있었고, 시전 부근에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시전에 일정한 액수의 세 금을 바쳤고 반드시 시전에서 산 것만을 팔아야 하였다. 이런 규정을 지킨다면 중도아들의 상업 활동은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사상 도고의 성장과 함께 중도아는 점차 사상 도고와 손을 잡고 시전을 배제하기 시작하였다. 또 한양 안에 있던 일반 사상 도고 중에서 상업의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중도아로 변신하는 이도 있었다. 이렇게 성격이 변한 이후의 중도아는 칠패에 터를 잡고 경강 상인과 결탁하여 생선을 한양에 유통시켰다. 중도아는 반드시 시전에서 생선을 사야 하는데도 경강 상인에게 생선을 다량으로 사고 시전에서는 약간만 사서 섞어서 판매하였다. 시전 상인이 난전이라고 하면 시전에서 구입한 것 아니냐고 따지면서 시전에 대항하였다. 그래서 한때 어물전인(魚物廛人)은 칠패의 중도아에게 생선을 팔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이들의 생선 구입이 시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경강 상인의 자금을 받은 중도아들이 원산 지역에서 들어오는 북어나 포목을 사기 위해 원산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다락원에 ‘건방(乾房)’이라는 점포를 두고 상품을 독점하였다. 그리고 틈을 보아 그 물건을 한양 칠패로 운반해서 전매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거나 다른 지역의 가격이 높으면 그것을 지방으로 유출하기도 하였다. 이때 경강 상인은 누원의 중도아와 뚝섬, 송파에 있던 상인과 연계하여 물건을 지방으로 보냈다.

심지어 칠패에 정착한 중도아 가운데 자본 규모가 큰 이들은 직접 상품의 원산지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북어 산지인 원산까지 가서 북어를 사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난전이라고 규제하려던 시전 상인을 구타할 정도로 세력이 상당해졌다.

여객 주인의 활동은 한양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활동은 지방 장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양 내에서 시전 상인이 금난전권을 무기로 행패를 부린다거나 한양에 너무 많은 상품이 공급되어 가격이 하락하면, 한양에 반입된 상품을 한양으로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송파 등 한양 외곽 장 시를 통해 삼남 지방이나 평안도 지역 장시로 유출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배로 다른 지역으로 반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점차 한양과 지방 장시의 동향을 긴밀하게 파악하고 가격이 좀 더 좋은 곳을 찾아 물건을 유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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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경기해로도(海西京畿海路圖)의 장산곶 부분
해서경기해로도(海西京畿海路圖)의 장산곶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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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여객 주인의 조직망이 컸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육상·해운 교통의 발달과 이에 따른 유통망의 형성 때문이었다. 18세기가 되면 전국적으로 일련의 유통망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국가의 조세 수취망에 편승하기도 하였고, 새롭게 유통로를 개척하기도 하여 형성된 것이다.

눈부신 것은 해상 교통의 발전이었다. 조선 전기만 해도 황해도의 장산곶과 서산의 안면도 근처는 물살이 매우 험해서 배가 다니기 곤란하였다. 특히 장산곶은 그 정도가 심해 정부가 그 길을 통해 조세를 운반하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들어 특히 경강 상인의 항해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장산곶을 제집 뜰을 거닐 듯이 자유자재로 들락거렸다.

이러한 항해 기술의 발전으로 상품 유통이 더욱 원활해 졌다. 예를 들어 원산에서 집하된 북어가 한양에 공급되려면 이전에는 육로를 통해야 하였다. 그러나 해로의 개통으로 남해를 거쳐 충청도 강경에 집하되면, 이것을 경강 선상이 구매하여 한양에 공급하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교통 수단의 운송량을 비교할 때 선운(船運)이 가장 대규모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만큼 상품의 유통량이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항해술이 발전하면서 주요한 포구마다 상업 거점이 형성되었다. 각 포구마다 상선이 들어오면 그 물건을 보관·판매해 주고, 또 내륙 지방에서 생산된 물품을 수집하여 선상에게 넘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주요 포구마다 상선이 출입할 때 통행세나 상업세를 걷거나 상품 거래를 주선하는 여객 주인층이 형성되었다.

포구는 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내륙과 해안 지역의 물품이 자연스럽게 집하되었다. 그리고 포구의 위치나 물동량에 따라 대포구가 지역적 유통의 중심이 되고, 그 밑에 몇몇 소포구가 하부 단위에서 상품 유통의 거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런데 상품 유통에 따른 이득이 증가하면서 각 포구마다 사활을 건 상선 유치 경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강경의 경우 금강 연안에 있는 논산과 줄포 등의 포구가 상선 유치를 통해 강경이 가지고 있는 상권을 빼앗으려고 노력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새로운 포구와 여객 주인을 만들어 기존 포구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한편 육상 교통도 발전하였다. 기존에 뚫려 있던 노선 대신 한양과 훨씬 가까운 거리로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新作路) 등이 개설되었다. 예를 들어 원산에서 한양으로 오려면 주로 철령을 통해 들어왔으나, 평강을 지나는 삼방간로(三防間路)가 개발되었다. 이 길은 원산에서 한양으로 오는 지름길일 뿐 아니라, 개성으로 갈 수 있는 옛길과 연결되어 평양 등 서북 지역과도 통하였다. 그래서 삼방간로에 주막과 촌락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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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나루
마포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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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평강의 설운령을 통과하는 설운령로(雪雲嶺路)를 개척하였으며, 경상도로 가는 길도 조령·죽령 외에 상주의 솔치나 문경과 괴산 사이 고갯길 등을 개척하였다. 정조가 수원으로 가기 위해 만든 신작로(지금의 1번 국도)도 육상 교통 발전의 한 예이다. 이러한 육상 교통의 발전은 한양으로 상품 공급을 원활히 하였다는 의미뿐 아니라 각 지역 장시 사이의 연결성도 증대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객 주인을 비롯한 경강 상인은 이렇게 발전된 육상·해상 교통을 발판으로 전국적 상업 유통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각 지역의 생산물이 집하된 각 포구의 주인층과 연계하여 포구를 돌아다니면서 상품을 매입하여 한양으로 공급하거나, 육로를 통해 공급되는 상품을 다락원이나 송파 등지에서 매입하여 한양으로 공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시세를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이 한양으로 반입한 상품을 가격이 비싼 곳으로 반출하기도 하였다. 즉, 경강 상인-포구 주인-장시의 보부상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구조 속에서 경강 상인은 한양만이 아닌 전국적인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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