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3. 경강 상인의 성장과 정경 유착
  • 주교사 설치와 쌀 폭동
  • 경강 상인의 성장과 주교사 설치
이욱

이처럼 여객 주인을 비롯한 경강 상인은 18세기까지는 경제적인 수단으로 한양의 유통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원가를 낮추기 위해 산업 자본에 투자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업(造船業)이었다. 밤섬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선 건조업에 경강 상인이 투자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자 권력과 유착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들이 일방적으로 권력층에 손을 내민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정부로서도 경강 상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 특히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은 충분히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경강 상인은 일찍부터 정부의 세곡 운송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세의 대부분을 선운을 통해 중앙 정부에 상납하였고, 그 속에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상품 화폐 경제 역시 상당한 부분이 선운을 통해 유통되고 있었으며, 그 유통로는 세곡 운송로와 일치하였다. 따라서 특정 상인이 안정적·독점적으로 세곡 운송을 맡는다는 것은 좀 더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이었다. 왜냐하면 세곡 운송에 참여하여 받는 선가(船價) 외에도 조세 수취에 편승 한 유통 부분은 관권의 침탈을 훨씬 덜 받으면서, 미숙한 시장 경제에서 지역적·계절적 가격차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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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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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경강 상인은 자신들이 계속 세곡 운송을 맡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하려면 정부 안에 일정한 비호 세력이 필요하였다. 세곡 운송에는 다양한 이권이 걸려 있어서 권력 기관에서도 세곡 운송에 참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정부로서는 세곡 운반 능력을 고려할 때 경강 상인을 도외시할 수 없었지만, 각 상사(上司)나 아문(衙門)의 청탁 역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강 상인이 안정적인 세곡 운송권을 반드시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1704년(숙종 30)과 1728년(영조 3)에 각각 전세곡과 대동미의 조운에 경강선을 작대(作隊)하여 운송하게 하였다. 이는 경강선을 이용하여 세곡 운송을 원활히 할 뿐 아니라, 경강선이 세곡 운송에서 저지르는 폐단을 방지하려는 정부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경강 상인의 안정적인 세곡 운송권은 오래 보장되지 못했다. 그것은 세곡 운송 용역에 상당한 이득이 있음을 알게 된 각 아문에서 선가를 취득하기 위해 특권을 이용하여 세곡 운송권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759년(영조 35)에는 영남 지역에 조운 제도를 복구하여 경강 상인의 세곡 운송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강 상인은 대사헌 김양심(金養心)을 동원하여 영남 조운제를 혁파하고 자신들에게 임운(任運)하도록 조종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경강 상인은 세곡 운송권을 보장받기 위해 요로에 청탁하였다. 경 강 상인의 노력은 1789년(정조 13)에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고 1793년(정조 17)에 「주교사절목(舟橋司節目)」을 반포하면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정조는 일찍부터 경강선을 이용한 세곡 운송에 호의적이었다. 1781년(정조 5) 호남 지역에서의 경강선 세곡 운송을 혁파하자는 건의에 대해, “경강선의 폐단 때문에 수천 포의 곡식을 잃을지언정, 어찌 수만 명의 경강민이 살아갈 길을 끊어 놓겠는가.”라고 할 정도였다.7)『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6, 일득록(日得錄) 정사조. 그리고 1793년 「주교사절목」을 만드는 과정에서, 비변사 측에서는 소금 배나 훈련도감 배를 주교사에 편제시키려고 하였으나, 정조는 곧바로 경강선을 지목하였다. 정조는 주교사를 설치할 때 내심 경강선을 활용할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주교선에 편제되는 대신 호남과 호서 지역의 세곡 운송권을 보장해 주었다.

이 조치는 경강 상인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물론 정조는 경강 상인을 이용하여 세곡을 안전하게 한양으로 운반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경강 상인이 저지르는 부정을 최소화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주교사는 경강 상인에게 또 다른 상업적 특권으로 작용하였다. 정부에서는 호남과 호서 지방의 세곡 운송은 반드시 주교선을 이용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하여 세곡 운송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경강 상인은 세곡 운송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 상인은 고패, 화수 등의 부정뿐만 아니라 고색배(庫色輩)와 짜고 규정 이상의 세를 거둬들이기도 하였고, 세곡을 운송하는 도중에 곡가(穀價)가 비싼 곳이 있으면 세곡을 팔아넘기고, 싼 지역에서 곡식을 구매하여 보충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들이 주교선에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부정에 대해서 지방 관리들이 쉽사리 처벌할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해 경강 상인은 주교선에 편입됨으로써 세곡 운송에 대한 선가를 취득하는 것 외에도 지역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쉽게 부를 축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유통 부문에 대한 관권의 침탈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주교사에 소속된 이후 정치 권력과의 결탁 가능성도 크게 높아졌다. 주교사를 관할하던 당상의 면면을 보면 정조 연간은 정민시(鄭民始), 이병모(李秉模), 김문순(金文淳), 심이지(沈履之) 등 정조의 측근 신하들이 임명되었다. 세도 정권 이후에는 주로 안동 김씨와 같은 세도 정권의 당국자들이 번갈아 임명되었다. 경강 상인은 이들 권력 실세와 접촉하면서 정경유착(政經癒着)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정경유착의 후유증은 쌀 폭동 발발과 그 처리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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