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4. 보부상과 혜상공국·황국 협회
  • 장시와 보부상
  • 장시의 발달
이욱

경강 상인이 전국적 유통망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장시(場市)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국으로 침체되었던 장시는 15세기 말 전라도 무안·나주 등지에서 큰 흉년을 맞아 ‘장문(場門)’을 한 달에 두 번씩 열어 필요한 물품을 교역한 것을 효시로 점차 전국 각지에 장이 서기 시작하였다. 장은 처음에는 15일이나 10일 만에 한 번씩 열렸다. 그러다가 점차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리게 되었다. 장은 몇 개 촌락의 주민이 하루에 왕복하여 교역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30∼40리의 간격을 두고 섰다. 그리고 17∼18세기가 되면 산간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또 장시 수가 많아지면서 점차 개시일(開市日)도 조정해서 인근 지역끼리는 개시일이 겹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18세기 말이 되면 전국의 장시 수가 1,000곳에 달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한 달 내내 그 지역 근처 어디에선가 장이 서게 될 정도였다. 이는 주거지 확산과 수공업,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배경으로 큰 장시가 작 은 장시를 흡수하면서 커다란 시장권(국지적 시장권 → 지역적 시장권 → 전국적 시장권)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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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현도(茂長縣圖)
무장현도(茂長縣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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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에서는 농민이 주인이었다. 장시는 농민에게 많은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한판 신명을 벌이는 곳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하거나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곳이었다.

시장에서 농민은 원래 반상인(半商人)이었다. 빈손으로 나가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우리 속담에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까 씨오쟁이 지고 따라간 다.”는 말에서 보듯이 무엇이든지 들고 나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잉여 생산물을 판매하는 활동이 장시의 발달과 함께 일반화되면서 장시에 출하되는 상품도 다양해졌다. 장시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농업 생산을 보완하고 농민 생활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농민이나 수공업자 자신이 생산하고 제조하여 직접 장시에 가지고 나와 교역하는 소상품이 거래되었다.

장시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조선 전기에는 주로 곡물이나 포목류, 소고기, 달걀, 떡, 술, 감 등 농가에서 부업으로 생산한 물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밖에 삿갓, 도롱이, 사기, 유기, 작두·쟁기·낫 같은 농기구 등 농업 생산에 필요한 것들이 매매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농민과 장시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공물 대신 쌀을 바치도록 규정한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 농민들은 직접 만든 무명 등 다른 생산물을 장에 가지고 가서 대동세로 바칠 곡식을 사야 했고, 포목이나 돈을 바치도록 되어 있는 지역의 농민들은 곡식을 가지고 장에 가서 돈이나 포를 구입해야 했다.

또 장시가 활성화되면서 농민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물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주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방식이었는데, 예를 들어 한양 근교 왕십리의 미나리, 강진의 감자, 개성의 인삼, 전라도·경상도 일부 지역의 면화, 전주의 생강, 진안의 연초, 임천·한산의 모시 등이 대표적이었다. 농민들은 이렇게 특산물을 팔아서 번 돈으로 생필품을 구입하였다. 예를 들어 생선이나 소금이 귀한 경상도 내륙 지역은 장시가 열리거나 소금배가 올라오기를 몹시 기다렸다.

아울러 장시 자체가 생산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장시가 개설되면 그곳을 중심으로 상인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가건물이나 노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물화가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주막이나 각종 점(店)이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점은 놋그릇 등을 제조하는 동점, 농기구나 솥 등을 제조하는 철점, 항아리 등을 제조하는 옹기점 등을 말하였다. 그 밖에 짚신, 미투 리, 가죽신, 갓, 망건 등을 판매하는 각종 가게에서는 상품 생산이 병행되었다. 안성장(安城場)이나 납청장(納淸場)이 전국적인 유기 생산지로 이름을 떨친 것은 이러한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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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酒幕)
주막(酒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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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상행위를 둘러싼 각종 협잡도 난무하게 되었는데, 장에 나가는 농민들은 이것을 가장 조심해야 하였다. 한양 칠패의 예이긴 하지만 다른 지역도 비슷했을 것이므로 예를 들어 본다.

서울의 서문에 큰 시장이 있다. 이곳은 가짜 물건을 파는 자들의 소굴이다. 백동(白銅)을 가리켜 은(銀)이라 하고, 염소뿔을 가리켜 대모(玳瑁)라고 우기며 개가죽을 담비가죽이라고 꾸민다. …… 소매치기도 그 사이에 끼어 있다. 남의 자루나 전대에 무엇이 든 것 같으면 예리한 칼로 찢어 빼낸다. 소매치기당한 줄 알고 쫓아가면 요리조리 피해 식혜 파는 골목으로 달아난다. 꼬불꼬불 좁은 골목이다. 거의 따라가 잡을라치면 대광주리를 짊어진 놈이 불쑥 “광주리 사려!” 하고 뛰어나와 길을 막아버려 더 쫓지 못하고 만다. 이 때문에 시장에 들어서는 사람은 돈을 전쟁에 진(陣) 지키듯 하고 물건을 곧잘 시집가는 여자 몸조심하듯 하지만 곧잘 속임수에 걸려드는 것이다.10)이우성, 임형택 편, 『이조 한문 단편집』 하, 이홍전.

장은 각종 속임수와 소매치기 등이 횡행하는 곳이었고,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가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장에 다니게 되면서 타산적이 되었다. “이곳 장의 떡이 큰가, 저곳 장의 떡이 큰가.” 하고 마음속으로 저울 질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후장에 쇠다리 먹으려고 이 장에 개다리 안 먹겠는가.” 하면서 눈앞의 이익을 좇기도 하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을에서의 생활은 눈에 보이는 데만 좋게 꾸며 어떻게든 속여서 이문을 남기려는 장사꾼을 접하게 되면서 타산적으로 변해 갔지만 장시는 여전히 어리숙한 농사꾼의 본색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또 후회하고 한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곳이 바로 장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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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향시(雪中向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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