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1장 상인과 정치 권력
  • 4. 보부상과 혜상공국·황국 협회
  • 장시와 보부상
  • 보부상 조직과 실상
이욱

이들 농민과 함께 장시의 주요 구성원은 행상(行商)이었다. 장에서 활동한 상인들은 이른바 장돌뱅이라고 불리는 행상이었다. 그들은 물품을 들고 장이 서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행상들, 이른바 장돌뱅이들의 삶은 고단하였다. 그들은 1리(釐)라는 작은 이익을 위해 5리(里)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음 민요는 그들의 삶을 잘 보여 준다.

짚신에 감발치고 패랭이 쓰고/ 꽁무니에 짚신 차고 이고 지고/ 이 장 저 장 뛰어가서/ 장돌뱅이 동무들 만나 반기며/ 이 소식 저 소식 묻고 듣고/ 목소리 높이 고래고래 지르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쳐 가며/ 돌도부 장사하고 해질 무렵/ 손잡고 인사하고 돌아서네/ 다음날 저 장에서 다시 보세.

이것은 어느 장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장돌뱅이들의 노래이다. 노래만 들어도 장돌뱅이들의 하루 일과가 보이는 듯하다. 고령 지방에서 채집된 다음과 같은 지신밟기 노래 역시 보부상들의 정서를 잘 전해 준다.

산토끼가 죽어가면 여우도 슬퍼하오/ 금수조차 그러한데 한심하다 우리 세상/ 무거운 등짐지고 이곳저곳 떠돌면서/ 아침에는 동녘 하늘 저녁에는 서녘 땅/ 어쩌다 병이 나면 구원할 이 전혀 없네/ 사람에게 짓밟히고 텃세한테 괄세받고/ 언제나 숨겨 두면 까마귀의 밥이 되고/ 슬프다 우리 인생 이럴 수가 어찌 있소/ 우리 산다 한들 몇 만 년을 살 것이오/ 한데 묶어 단결하고 기율로서 다스리면/ 형도 좋고 아우 좋고 서로서로 도울 제면/ 동네방네 좋을시고 우리 고을 좋을시고.

장돌뱅이들은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 쉼 없이 걸어 다녔다. 그러기에 짚신에 감발치고, 또 꽁무니에 짚신을 차고 다녔다. 그리고 장돌뱅이들이 쓰던 지게는 다리가 보통 지게보다 길었다. 장돌뱅이들은 행상을 다닐 때 느긋하게 쉴 틈이 없었다. 다른 상인보다 일찍 가야 이문을 많이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 힘들더라도 앉아서 쉬지 못하고 지게를 지고 서서 쉬었다. 그러려면 자연 지겟다리가 길어야 하였다.

이렇게 행역(行役)에 시달리며 살아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언제 길거리에서 객사(客死)해서 까마귀 밥이 될지 모르는 처지였다. 장삿길에 나섰다가 병이 나면 병구완해 줄 사람도 없고,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천대와 텃세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집을 오래 비우기 때문에 오쟁이를 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정월 초에 행상을 떠나면 세밑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행상이 많았던 개성 일대에는 생일이 특정한 달에 몰려 있는 마을이 많았다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집을 오래 비우다 보니 부인이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나서 도망치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래도 고향에 처자를 두고 있는 사람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아예 장가를 들지 못해 식솔이 없는 사람도 많았고, 가족이 있더라도 일정한 거처가 없어 처자식을 데리고 장삿길에 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자니 자연 남녀가 한 방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주막의 봉놋방에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들과 어울려 잠자리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떻게 보면 풍기가 문란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장돌뱅이들은 서로서로 자신들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고, 그리운 마음에 찾은 고향에서 마누라가 도망친 빈집을 바라봐야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동료 말고 누가 있겠는가?

또 혼자서 어두운 산길을 가다 보면 자칫 산적을 만나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물건만 뺏기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칫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새재같이 높은 산에서는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었다. 자연 행상을 다닐 때는 몇몇이 동행을 해서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 우연한 만남과 동행이 잦아지면서 점차 행상끼리 조직 형태를 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행상 가운데 조직에 가입한 상인을 보부상(褓負商)이라고 하였다. 보부상 조직이 언제 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부상의 문서인 「혜상공국서(惠商公局序)」와 「완문(完文)」 등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보부상 역사에 대한 이들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 기원은 “기자조선시대에 부상을 시켜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라고 하여 아주 이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보부상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토산(兎山) 사람 백달원(白達元)이 800여 명의 부하 보부상들을 거느리고 와서 군량미를 운반했는데 왕이 된 이성계가 그들의 공로를 기억하여, 어염·무쇠·곡물·백지·목기 등의 행상권을 전담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에 가깝다.

확대보기
바구니 장수
바구니 장수
팝업창 닫기

보부상의 문서에는 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도 자기들이 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난이 평정된 후에 공을 인정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장시가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 즉 17세기경일 것이다.

보부상 조직은 원래 보상과 부상 두 개의 조직으로 이루어졌다. 보상은 등에 봇짐을 지고 다니면서 주로 조바위, 남바위, 빗, 염낭, 댕기, 분, 비녀 등을 팔던 상인을 말하며, 여성이 많았다. 그리고 부상은 지게를 지고 어염(魚鹽)이나 각종 그릇을 팔던 상인이었다.

원래 부상과 보상은 엄격히 구별되었고, 각자 독자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883년 중앙에 혜상공국(惠商公局)이 설치되고 두 조직이 합쳐져 군국아문(軍國衙門)에 부속되었다. 2년 후에 혜상공국은 상리국으로 바뀌고 부상은 좌단, 보상은 우단으로 불리게 되었다. 1894년에는 부상과 보상을 농상아문 관할 아래 두었고, 1897년 황국 협회(皇國協會)로 이속되었다가 1899년에 다시 상무사로 옮겨지면서부터는 부상은 좌사로, 보상은 우사로 불렸다.

보부상 조직은 특히 견고하기로 유명하였다. 경기도 개성의 발가산(發佳山)에 이들의 총본부가 있었는데, 이것을 착임방(着任房)이라고 하였다. 경기도 용인군에 있던 장시인 김량장(金良場)에 부본부인 차임방(次任房)이 있었고, 각 도와 군에는 각각 도임방, 군임방이 있었다. 임방을 접소(接所)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도반수(都班首), 반수, 영수(領首), 접장(接長), 유사(有司), 공원(公員) 등의 임원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또 각 도에는 보상과 부상이 각각 따로 도방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도방은 일종의 숙박소로, 감영이 있는 지역의 장시 주변에 있었다. 각 보부상은 자신이 보부상 조직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유척(鍮尺)이나 첩장(帖狀)을 가지고 다녔다.

보부상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각자 소속 임방에 봄가을로 돈을 냈는데, 봄에 내는 돈은 춘수전(春收錢)이라고 하여 임방 성원이 병이 났을 때 썼고, 가을에는 추보전(秋補錢)이라고 하여 성원이 죽었을 때 장례비로 썼다. 춘수전과 추보전을 내면 임방은 도장을 찍은 자문(尺文)이라는 문서를 영수증으로 주었다.

아울러 보부상은 조직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괄시받거나 비난받지 않기 위해 규율을 엄히 하였다. 조직원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가 속한 도방에서는 당사자에게 장문(杖門)을 놓아 죄를 다스렸다. 장문이란 작대기 두 개를 마주 매어 문처럼 걸쳐 놓는 것인데 그 앞으로는 누구도 넘어갈 수 없었고 그것을 건드릴 수도 없었다.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 다스리는 방법이 달랐는데, 부상의 경우 죄가 가벼우면 태형으로 다스렸고 죄가 무거우면 멍석으로 말아 놓고 부상들의 휴대품인 물미장(勿尾杖)으로 징치(懲治)하였다. 보상의 경우에는 죄가 가벼우면 가지고 다니는 유척이라는 자로, 죄가 중하면 멍석말이로 다스렸다. 이것은 말하자면 보부상단의 형법이었다.

1851년에 작성된 보부상 조직의 문서인 『예산임방입의절목(禮山任房立 議節目)』을 보면, 주로 처벌되는 죄목과 형벌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설명이 필요하므로 전문을 소개한다.

확대보기
예산임방입의절목
예산임방입의절목
팝업창 닫기

1. 부모에 불효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자는 볼기 50대를 친다.

2. 선생(조직의 우두머리)을 속이는 자는 볼기 40대를 친다.

3. 시장에서 물건을 억지로 판매하는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4. 동료에게 나쁜 짓을 한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5. 술주정하면서 난동을 부린 자는 볼기 20대를 친다.

6. 불의를 저지른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7. 언어가 공손하지 못한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8. 젊은 사람으로서 어른을 능멸한 자는 볼기 25대를 친다.

9. 질병에 걸린 동료를 돌보지 않은 자는 볼기 25대를 치고 벌금 3전을 물린다.

10. 놀음 등 잡기를 한 자는 볼기 30대를 치고 벌금 1냥을 물린다.

11. 문상하지 않은 자는 볼기 15대를 치고 벌금 5전을 물린다.

12. 계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자는 볼기 10대를 치고 벌금 1냥을 물린다.

13. 부고를 받고도 연락하지 않은 자는 볼기 10대를 치고 벌금으로 부조로 낼 돈의 두 배를 물린다.

14. 모임에서 빈정대며 웃거나 잡담하는 자는 볼기 15대를 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보부상 조직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은 자와 길거리에서 병이 난 동료를 돌봐 주지 않은 자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쓴 동료를 모른 체한 자, 동료나 보부상 조직의 임원들에게 행패를 부린 자 등을 매우 엄한 벌로 다스렸다. 보부상은 동료의 불행, 죽음, 동료의 불의(不義) 등을 알리고, 이를 도와 주거나 징계하였다. 그리고 남자 보부상은 동료 여자 보부상의 짚신도 넘지 못하게 하였다. 행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풍기 문란을 막으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서로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온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또 보부상은 긴급한 연락이 필요하면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려 각 보부상들에게 연락하였다. 이것은 사발 주위에 먹을 칠해 백지의 한복판에다 찍으면 커다란 원이 되는데, 그 둘레에 통보하는 사람의 이름을 누가 주동자인지 모르게 돌려가며 쓴 것이다. 사발통문을 한 번 놓으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발송하는 주최 측이 이를 부담하였다. 사발통문을 돌리는 경우는 전쟁 또는 부역 등 국가의 공적인 목적으로 보부상을 소집하였을 때, 보부상이 아내를 잃어버리거나 상처하였을 때, 시장에서 보부상 간이나 보부상과 관원 또는 일반인 사이에 불화가 있을 때였다.

아울러 보부상은 조직의 단결을 유지하거나 행상의 고달픔을 달래기 위해 자신들의 놀이를 만들어 즐겼다. 보부상 놀이는 영감영접행진놀이와 광대놀이에 이어 보부상 고유의 제사인 공문제(公文祭) 등의 행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구성되는 보부상의 행렬은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연출된다.

행렬 맨 앞에는 봉매기(奉枚旗)와 푸른 실로 몸체를 삼고 위와 아래에 붉은 등을 매단 청사등롱(靑紗燈籠) 수십여 개가 나가고, 긴 저고리에 통바지에 신들매 고쳐 맨 80여 명의 장정이 솜뭉치를 매단 패랭이를 쓰고 용을 그린 물미장을 짚고 나가면 그 뒤로 각설이, 걸궁패, 들병이, 유무(遊巫) 등 잡색패, 용천뱅이 호인(胡人) 환술사 등이 뒤를 따른다.11)정승모, 『시장의 사회사』, 웅진출판, 1992, 130쪽.

이러한 광경은 이들 조직이 살아 움직이던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장을 처음 열 때 이와 같은 놀이를 포함한 난장을 벌였는데 이것을 통해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었고 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