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1. 조선시대 한양 시전 상업의 조건
고동환

상인은 시장에서 상품을 유통시켜 이익을 얻는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상인은 상품의 운송·보관 등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그 대가를 얻는다. 상업 이윤은 생산자가 생산한 상품의 가치를 보존·유지하는 대가로 상인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상인들이 이익을 얻는 방식은 오늘날보다는 단순하였다. 상인들은 생산자가 생산한 상품을 싸게 구입하여 소비자에게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었다. 구매 가격과 판매 가격의 차이가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은 계절과 지역에 따른 차이였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 허생은 조선 최대 갑부로 알려진 변 부자(卞富者)에게서 1만 냥을 빌렸다. 그 돈으로 삼남(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가장 큰 장시인 안성장에서 대추, 밤, 감, 배, 석류, 감자, 귤 등 제수용품을 시가의 두 배로 구입하여 창고에 쌓아 둔 채 명절이 오기를 기다려 열 배나 오른 가격에 처분하여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안성장에서 큰 이익을 본 허생은 이제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말총을 독점하여 다시 큰 이익을 얻었다. 이 수법은 지역과 계절에 따른 가격차에다 독점 방식을 가미하여 이익을 극대화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계절과 지역에 따른 가격차와 매점 매석(買占賣惜)이라는 독점 외에도 국가 권력 등 특권을 매개로 시세보다 훨씬 싸게 구매하여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상인들도 있었다. 이처럼 정부에서 부여한 특권을 매개로 상품 유통의 독점권을 행사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는 상인이 바로 시전 상인(市廛商人)이다.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대가로 독점적 유통권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소유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막대한 부를 축적한 시전 상인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시대의 전반적인 시장 상황을 살펴보자. 조선시대의 시장은 공간에 따라 도시 시장, 농촌 시장, 포구 시장,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 시장으로 구분된다.

도시 시장은 상인들이 상주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판매한 상설 시장인 시전, 말이나 소 또는 땔감처럼 특정 장소에서 일시에 장이 섰다가 곧 파하는 시장,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유 상인들이 소비자를 상대로 자유롭게 상품을 판매하는 난전 등이 있었다. 이처럼 도시 시장은 다양했지만, 상업의 중심은 역시 시전이었다. 5일마다 장이 서는 농촌 장시는 농민들이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을 장날에 처분하는 생계형 시장으로, 이곳에서는 농민과 더불어 행상(行商)과 보부상(褓負商) 등이 활동하였다.

포구에서 상업 활동을 담당한 층은 직접 배를 운항하여 대량의 화물을 구매하여 다른 곳에서 판매하는 선상(船商)과 더불어 포구에서 선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화물 보관, 매매 중개, 금융 대부 등의 업무를 주로 일삼는 객주층(客主層)이 있었다. 물론 포구는 전체 유통 시장의 위계 속에서 보면 주변 장시보다는 상위의 시장이므로 주변 장시의 행상이나 보부상 등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는 시장이기도 하였다. 대외 무역은 역관(譯官)과 더불어 동래·개성·의주 상인, 한양의 시전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이처럼 조선 사회에는 다양한 시장이 있었고, 시장마다 성격이 다른 상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상인들은 발생 기원도 다르고 시장에서 하는 일도 달랐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상인은 왕과 귀족이 거주한 도성 안의 상업과 대외 무역에도 일정 부분 관여한 시전 상인들이었다.

시전은 조선시대 왕실과 정부, 사대부를 위해 도성 안에 설치한 상설 유통 기구였다. 조선 전기에는 수도인 한양에만 있었으나, 후기에는 개성·평양·전주 등지에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지방 도시의 시전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서 시전이라고 하면 대개 한양 운종가(雲從街)에 설치된 시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전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수도 한양의 위상을 살펴야 한다.

조선시대 한양은 왕과 고위 관료, 그들의 정치·문화·일상생활을 보좌하던 하례(下隷)들이 거주한, 정치·군사·문화·행정·경제의 중심지로서 다른 어떤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였다. 한양의 상업 문화를 특징 지은 요소로는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한양이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지정학적 위치이다. 한양은 우리나라에서 유역 면적이 가장 넓은 한강을 끼고 있으면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다. 이 점은 한양이 조선 왕조의 수도로 정해진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전국의 육로는 물론 해로가 한양으로 쉽게 연결되었고, 전국의 물자가 한양을 중심으로 유통될 수 있었다.

둘째, 중세적인 경제 체제에서 나타나는 요인이다. 조선 왕조의 경제 체제는 농업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적인 현물 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농가 경제 측면에서는 농업과 수공업의 긴밀한 결합에 따라 생활필수품을 자급자족하는 경제 체제가 운영되었다. 농기구나 솥 등 소수의 수공업 제품은 시장을 통해 구매하였지만, 의류나 곡물 등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자체 생산으로 조달하였다. 국가 경제 측면에서는 왕실이나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용조(租庸調)라는 현물 부세 수취를 통해 해결하였으며, 수공업 제품 등도 장인(匠人) 등을 사역시킴으로써 직접 조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궁궐, 산성(山城), 산릉(山陵) 등을 건설하는 토목 사업도 농민의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부역(賦役)을 통해 해결하였다. 자급자족적인 현물 경제라는 경제 운영 체제 아래서 상업의 지나친 발달은 조선 왕조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억제되었다. 조선 왕조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직업관에 따라 상업을 말업(末業)이라 하여 천시하고, 억제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바로 중세적인 경제 체제, 곧 중세적인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한양의 상업은 이처럼 농본 국가의 억말 정책(抑末政策) 아래 운영되었다.

셋째, 중앙 집권적인 중세 국가의 수도였다는 점이다. 한양에는 전국에서 생산된 생산물이 조세나 공물 또는 소작료의 형태로 반입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물자를 소비할 경제력을 갖춘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양은 농산물이나 수공업 제품의 생산지로서의 성격은 매우 미약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물자가 가장 풍부한 곳이었다. 특히, 정부는 조세와 부역 체제로 충당되지 않은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최소한의 범위에서 어용 상업 체제인 시전 제도를 한양에서 운영하였다. 그러므로 시전 상업은 처음에는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라기보다는 주로 관청과 지배층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다.14)고동환, 「조선시대 서울의 상업 문화」, 『서울 문화 연구』 3, 서울문화사학회, 2000.

이처럼 시작된 한양의 시전은 조선 왕조 개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1894년 갑오개혁 때 시전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된 것이 아니라 사회 발전에 따라 자기 모습을 다양하게 변모시키면서 발전해 왔다. 앞으로 이 글에서는 시전 제도의 변화 모습을 조선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살펴보고, 시전 상인의 내부 조직과 시전의 종류와 판매 물종, 나아가 이러한 상인·상업 제도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한양의 도시 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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