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2. 시전 상업의 시기적 변화
  • 조선 전기 신도의 시전 상업
고동환

하늘이 다진 터전

금탕(金湯)보다 장하도다

우리 임금 명을 받아

한양에 도읍하였네

하늘이 만든 지역

평탄하고 광활하이

사방의 거리가 균등하여

배와 수레 모두 닿네

여기에 도읍 세워

원근이 다 기뻐하네.15)권근,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 권1, 「응제시(應製詩) 진천감화산신묘시병서(進天監華山神廟詩幷序)」.

이 노래는 권근(權近)이 한양의 성스러움을 노래한 「화산시(華山詩)」의 일부이다. 권근이 노래하였듯이 한양은 조선 건국 세력이 건설한 신도시였다. 그러나 한양의 형성 과정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한양이 새로운 왕조 의 도읍으로 확립되기까지에는 왕조 교체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등 정치적 격변을 겪어야만 하였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1392년(태조 원년) 8월 13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한양 천도 명령을 내렸지만 곧바로 실행되지 못하고 계룡산 등 다른 길지(吉地)를 찾는 노력을 계속하다가 1394년(태조 3)에 이르러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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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거리 복원도
육조 거리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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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왕도로 정비되어 가던 한양은 천도 4년 만인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그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 1차 왕자의 난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靖安君) 방원(芳遠)이 세자 방석(芳碩)과 그 옹호 세력인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제거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태조는 퇴위하였고, 둘째 아들인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은 그 이듬해 3월 한양에서 불길한 일이 연이어 발생한다는 점을 이유로 개경으로 일시 도읍을 옮겼다. 태조 때 건설한 종묘와 사직은 여전히 한양에 위치하여 종묘와 사직에 대한 제사는 한양에서 치렀으나, 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개경에 거주하였으므로 한 나라에 수도가 두 개 있는 일국양경(一國兩京) 체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00년(정종 2)에 발생한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종이 정안군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함으로써, 정안군이 3대 태종으로 즉위 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인 태조가 강력히 권유하여 1405년(태종 5)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還都)함으로써 한양은 새로운 왕조의 도읍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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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총도의 시전 부분
수선총도의 시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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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은 신도시 한양의 상업 시설은 한양 환도 7년 만인 1412년(태종 12) 2월 이후 세 차례에 걸친 공사 끝에 총 2,027칸 규모로 건설되었다. 이때 건설된 행랑(行廊) 중에 운종가(雲從街)-종묘 앞의 누문(樓門) 구간과 종루-광통교 구간, 즉 오늘날의 종로 1가-종묘 앞 구간과 종각-광교 구간이 시전 전용 행랑으로 사용되었고, 1472년(성종 3)에는 일영대-연지동 석교(石橋) 구간에 위치한 행랑이 시전용으로 확대 사용되었다. 시전 행랑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표를 세워서 시전의 이름과 판매 물종을 표시하였다.

각 시전은 하나의 물종(物種)에 대해 하나의 시전만을 인정하는 일물일전(一物一廛)의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관부나 궁궐 또는 지배층의 사치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러나 초기 한양 에는 정주(定住) 인구 외에 행정이나 군역 등의 일로 잠시 거주하는 유동 인구도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초기 시전 상인은 개성에서 강제로 이주한 상인과 수공업자였다. 수공업자의 시전은 순수 상인의 시전에 비해 규모나 자본력에서 영세하였다. 수공업자 자신이 생산한 제품을 직접 판매한 것은 아직까지 생산과 유통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시전 상인은 상인 한 사람마다 좌고세(坐賈稅)라 하여 1년에 면포(綿布) 한 필씩을 바쳤으며, 행랑 사용료로 행랑 한 칸마다 공랑세(公廊稅)로 봄가을에 쌀 두 말을 바쳤다. 좌고세는 국가에서 시전 상인에게 상업 활동을 허용하는 데 따른 일종의 면허세인 셈이며, 공랑세는 시전 행랑에서 영업하는 데 따른 영업세인 셈이다.

시전 상인은 이와 같은 공식적인 세금 외에도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할 의무도 지고 있었다. 이를 책판의무(責辦義務)라고 했는데, 이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시전 상인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였다. 시전 상 인은 시전 상인에게만 부과되는 잡역인 시역(市役)도 동시에 부담해야 하였다. 시전 상인은 이러한 부담을 대가로 국가에서 건설한 행랑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상품 매매를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16)서성호, 「15세기 서울 도성의 상업」, 『서울 상업사』, 태학사, 2000 ; 박평식, 『조선 전기 상업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9.

시전 상인은 이처럼 정부의 보호 아래 성장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의 통제를 받기도 하였다. 시전 상인은 도량형을 속이는 등의 불법 상행위에 대해서는 금난(禁亂)이라 하여 경시서(京市署), 한성부, 사헌부의 통제를 받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난전(亂廛)에 대한 규정은 없고 평시서(平市署, 세조 12년에 경시서를 바꾼 이름)가 시전 상인의 도량형기 부정 사용을 단속하고, 물가의 등락을 조절하는 일을 맡는다는 규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16세기 초반까지도 상인에 대한 주된 통제는 조선 후기의 금난전권처럼 비시전계(非市廛系) 상인들의 자유로운 매매 행위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시전 상인의 불법 상행위에 대한 통제였다. 이때까지 자유 상인인 사상(私商)이 시전 상인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한양에는 시전 외에도 다른 장터가 있었는데, 여항 소시(閭巷小市)가 대표적이다. 여항 소시는 말 그대로 ‘골목 안의 작은 저자’라는 뜻으로 영세한 상인들이 채소류나 수공업 제품 등 소소한 물건을 자기 집 문 앞이나 동네 어귀에서 판매하는 시장이었다. 도성 안에는 농업이 금지되었으므로 한양 주민들은 필요한 물자를 녹봉(祿俸)이나 시장을 통해 구매해야 했는데, 영세민들은 대개 일용품을 시전보다는 여항 소시에서 구매하였다. 여항 소시는 왕실과 지배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치된 시전과 달리 일반 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는 소규모 시장이었다.

시전 상업은 성종 때인 1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하였다. 이에 맞춰 시전 행랑이 증설되었고, 종류별로 시전을 구분하는 시전 재편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시전 상업이 성장한 요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도성 인구의 증가로 상품 수요가 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기존에 현물로 반입되던 공물(貢物)이 한양 시장에서 직접 구매하여 관청에 납부하는 공물의 경중방납(京中防納), 무납(貿納) 추세가 확대됨에 따라 한양의 상품 시장이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양의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확고하게 성립되었다.

15세기 후반 확립된 시전 중심의 한양 상업 체제는 16세기 이후 중국, 일본, 여진과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더욱 확대·발전하였다. 중국의 비단과 원사(原絲), 조선의 면포(綿布)와 은(銀), 일본의 은과 구리 등이 주요 교역품이었다. 한양의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은 삼포(三浦), 한양, 의주, 북경으로 이어지는 국제 교역망에서 중국과 일본의 상품을 중개하는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국제 교역 체제는 16세기 후반 이후 전 지구적 소빙기(小氷期) 기후로 인해 만주 지역의 야인(野人)들의 남하가 계속 이어짐에 따라 점차 위기에 봉착하였다. 거듭되는 흉작으로 기근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진행된 국제 교역은 상급 신분층의 수요를 충족하는 사치품 위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한양의 상업은 동아시아 세 나라의 시장과 연결되면서 크게 발전하였지만, 시장 구조 면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인과 권세가의 유착이 심화되었다. 국제 교역의 활성화로 발생한 상업 이윤은 대부분 관료와 상인 개인의 치부 대상이 되어 버렸고, 국부(國富)의 증진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17)이태진, 「16세기 국제 교역의 발달과 서울 상업의 성쇠」, 『서울 상업사』, 태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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