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2. 시전 상업의 시기적 변화
  • 조선 후기 성시 상업의 번성
  • 국역과 육의전 체제의 성립
고동환

17세기 후반의 금난전권 확립과 더불어 시전의 부담도 바뀌었다. 조선 전기 시전 상인들은 좌고세와 공랑세 외에 책판과 잡역을 부담하였지만, 17세기 후반 이후 시전 상인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시전 상인에게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氷庫)에 저장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장빙미(藏氷米)와 궁궐 각 전각(殿閣)의 수리, 도배 등에 필요한 물자가 고정적으로 부과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에 시전 상인들이 부담하는 역을 시역(市役)이라고 불렀지만, 조선 후기에는 국역(國役)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국역 체제 아래서 시전 상인은 여전히 정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의무도 지고 있었다.

시전에 부과된 역을 국역이라고 한 반면, 개별 시전이 부담해야 할 국역의 부담 비율을 분역(分役)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시전은 국역을 부담하는, 즉 분역을 지는 유분각전(有分各廛)과 국역을 부담하지 않는, 즉 분역이 없는 무분각전(無分各廛)으로 구별되었다. 분역은 이익을 가장 많이 내는 시전 순으로 10분역에서 1분역까지 차등 부과되었다. 무분각전은 규모가 영세하여 국역은 없었지만, 평시서나 시전 전체에서 부담해야 할 각종 잡역 등은 부담하였다.

조선 후기 시전을 대표한 육의전(六矣廛)도 17세기 후반 이후 국역 체제가 확립되면서 성립되었다. 육의전이 창설된 까닭은 그전에 평시서에만 맡겼던 시전 관리 업무를 시전 상인이 자율적으로 관할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7세기 후반에 상당수 시전이 새로 창설되었다. 시전이 늘어나고, 시전 상인이 자체적으로 난전 상인을 단속할 권한을 부여한 금난전권이 확립되자, 시전 상인이 저지르는 불법 행위를 평시서 관원의 힘만으로는 통제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평시서에서는 1691년(숙종 17) 시전 가운데 분역을 담당하는 비율이 가장 큰 여섯 개 시전을 조직하여 시전 상인 스스로 자신들의 불법 행위를 규찰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육의전 발생의 시초였다. 그 후 평시서에서는 이들 여섯 개 시전에 시전 규찰 업무 외에도 국역 조달 업무도 맡겼다. 이로써 육의전은 국역 청부를 담당하는 시전 상인 조직의 대표로 확립되었다. 이러한 육의전 체제는 1705년(숙종 31) 제도적으로 성립하였다.

1705년 육의전 체제가 성립한 이후 시전 상인의 등록 장부인 시안(市案)도 정비되었다. 17세기 말까지는 시전의 이름 그리고 국가에 대한 시전의 국역 부담 비율을 나타내는 분역(分役)과 분등(分等)만이 기록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706년(숙종 32)부터 각 시전이 취급하는 물종이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면주전(綿紬廛)이면 면주전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물종을 일일이 시안에 기재하여, 시안에 등록된 물종을 다른 사람이 판매하면 이를 난전으로 붙잡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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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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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에 한 시전이 취급하는 물종이 구체적으로 등록된 것은 비시전계 상인들의 난전 활동을 억압하는 조치였을 뿐 아니라 수공업자인 장인(匠人)들에 대한 상업 자본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이는 시전 상인끼리 판매 물종을 둘러싼 각종 혼란과 분쟁을 방지하려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를 거치면서 재편된 시전 체제는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이 혁파될 때까지 18세기 성시 상업(城市商業)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였다. 종전 정부에 대한 물자 조달이나 진배(進拜)를 주로 담당하던 한양의 시전 상업은 17세기 말을 전후하여 민간에 대한 상품 판매 기능이 대폭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상업 체제로 성격이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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