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2. 시전 상업의 시기적 변화
  • 도성 3대 시장과 경강 상업
  • 난전 상업과 통공 정책
고동환

18세기에는 시전 상업뿐만 아니라 시안에 등록되지 않은 자유 상인인 사상(私商)의 난전 상업도 크게 번성하였다. 이 시기 나타난 난전은 대개 여섯 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첫째, 손에 지닐 수 있는 조그마한 수지물(手持物)이나 자신이 직접 제조한 수조물(手造物)의 판매를 합법적으로 허용받았던 훈련도감 군병이 이외의 물건들을 판매하는 행위로서, 이러한 형태의 난전은 17세기 후반에 극도로 번성하여 시전 상인과 경쟁하는 단계까지 진전되었지만, 18세기 금난전권이 확립되면서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었다.

둘째, 외방(外方)의 향상(鄕商)이나 선상(船商)들이 직접 소비자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로서, 이는 영세 소상인이 전개한 난전이었다. 한양 주민 중에서도 흉년이 들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소한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난전 활동도 군병의 난전 활동처럼 18세기 전반 금난전권의 확립으로 점차 위축되었다. 그러므로 정부에서는 이들 소상인의 생계유지를 들어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부정하는 통공 정책(通共政策)을 취하였다.

셋째, 한양의 수공업자들이 직접 제조한 물품을 시전을 거치지 않고 판매하는 행위로, 이것은 조선 전기 시전 상업 체제가 상인만이 아니라 수공업자가 직접 제조한 물건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한 데서 18세기 전반까지 일상적으로 전개된 상행위였다. 17세기 후반 이엄장(耳掩匠)은 어떠한 형식적 규제도 없이 이엄전(耳掩廛)을 자연스럽게 창설하여 상행위를 하고 있었고, 1678년(숙종 4) 이엄전이 폐지될 때 이엄장은 18세기 시전 상인과 달리 이에 대해 반발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까지도 수공업자가 직접 제조하여 판매하는 것을 시전 상인들이 규제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즉, 제조와 판매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업이 영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난전권이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판매권을 공고히 하는 법제로 확립되고, 1706년 시안에 물종별 구분이 명확해지면서 이와 같은 수공업자의 직접 판매 행위가 난전 행위로 지목되어 금지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야장(冶匠)과 잡철전(雜鐵廛), 모의장(毛衣匠)과 입전(立廛), 주피장(周皮匠)과 상전(床廛), 총장(驄匠)과 상전, 가칠장(假漆匠)과 칠목기전(漆木器廛), 도자장(刀子匠)과 도자전(刀子廛)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다. 이 분쟁들은 야장과 잡철전, 모의장과 입전의 경우처럼 원료 매입권을 둘러싼 분쟁의 형태로 전개된 경우도 있지만, 그 밖의 경우는 모두 수공업자가 제조한 제품의 판매권을 둘러싸고 벌어졌다.24)『시폐(市弊)』 奎15085 권3, 잡철전.

이러한 분쟁에서 주목되는 것은 18세기 이전부터 수공업자들의 직접 판매 행위가 있었지만, 중간에 파전(罷廛)되었다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조 판매하는 물종이 대부분 시안에 등록되어 시전 상인들이 전매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원래 수공업자들에게는 제조 판매권이 허용되었는데, 시안에 시전 상인들이 주관하는 물종이 등록되면서 수공업자와 시전 상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정부에서는 일방적으로 시전 상인의 독점권을 옹호하는 판결만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시전 상인들은 시안에 전관 물종 등록(專管物種登錄)을 근거로 수공업자들을 통제, 지배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결국 18세기 후반 들어 수공업자들의 판매 영업권이 점차 부정됨에 따라 이들은 단순 제조업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는 제조와 판매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상업 자본이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넷째, 난전은 세력가와 결탁한 사상들의 도고 난전 상업 형태로 나타났다. 이들의 상행위는 한양 도성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방에서부터 한 양으로 반입되는 유통로를 장악하거나, 생산지에서부터 상품을 매점함으로써 시전 상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상 도고의 난전 활동은 18세기 후반에 가장 활발하였는데, 이는 시전을 정점으로 한 유통 체계를 붕괴시키고 사상을 정점으로 한 유통 체계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섯째, 난전은 시전을 정점으로 한 유통 체계의 하부에 종속되었던 중도아(中都兒), 여객 주인(旅客主人)들이 시전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이는 시전 체계의 유통 질서를 혼란시키는 행위였다. 예컨대 시전을 정점으로 한 유통 체계 아래서 어물 유통 구조는 외방 선상이 어물을 싣고 경강에 도착하면, 경강 여객 주인이 어물전 시민(市民)에게 알리고, 어물전 시민이 경강에 나와 선상에게 싣고 온 어물을 모두 구매하고,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상행위로서 중도아라고 불리는 중간 상인이 어물전에서 어물을 떼다가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경강 여객 주인과 중도아들은 시전 상인을 배제하고 직접 어물을 유통시킴으로써 시전 상인의 어물 유통 독점권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는 시전 상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난전 활동으로 꼽혔다.

여섯째, 시전 상인 내에서 벌어진 난전 활동으로 시안에 등록되지 않은 물건을 판매하거나 다른 시전의 영업 구역을 침범하여 영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쟁 가운데는 이들 제품의 원료를 취급하는 시전과 완제품을 판매하는 시전 사이의 분쟁도 있었으며, 새로이 상품으로 등장한 물종을 차지하기 위해 비슷한 물종을 판매하는 시전 사이에 분쟁도 벌어졌다. 이러한 분쟁을 판결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시안에 등록하였는지 여부였다. 그러므로 시전 상인들은 시안을 몰래 고치거나 임의로 변조하는 불법 행위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시전 상인끼리 영업 구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은 상미전, 하미전, 잡곡전 사이의 분쟁이 대표적이다. 상미전(上米廛)과 하미전(下米廛)은 조선 건국 초에 설립되어 종루의 서쪽은 상미전, 동쪽은 하미전이 영업 구역으로 삼고 있었는데, 상미전 세력이 성장하면서 철물교 이상 지역까지 자신들의 영업 구역으로 삼은 나머지 1773년(영조 49)부터 분쟁이 발생하였다. 또한 상미전과 잡곡전의 분쟁은 원래 잡곡전은 특정한 영업 구역의 제한 없이 도성 내외 전체에 잡곡을 판매하는 영업권을 소유하였으나, 잡곡전에서 쌀을 판매하면서 이에 대한 수세권의 행사를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였다.

18세기 중·후반에 걸쳐 전개된 다양한 난전 활동으로 일부 품목에서는 금난전권의 권리 내용이 변하였다. 18세기 이후 한양 인구가 3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면서, 한양 주민의 수요가 늘었을 뿐만 아니라 시장 규모도 도성 안에서 점차 도성 밖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한양 주민을 광범한 수요자로 두었던 어물, 미곡 등 일용품 판매는 시장 확대와 인구 증가로 수백 명 규모의 시전 상인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미전과 어물전에서는 하부에서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영세 소상인에게 자유로운 영업 행위를 허용하는 대신에, 이들에게 일정액을 수세함으로써 금난전권의 특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즉, 금난전권의 권리 내용이 난전인 착납권과 난전물 속공권의 형태에서 하부 소상인에 대한 수세권으로 바뀌었다.

18세기 전반 사상 세력의 신전 창설은 미나리나 채소류 등 아주 미미한 물종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시전을 창설한 상인은 이를 토대로 영세 상인의 자유로운 판매를 억압하였다. 이는 시안에 등록하지 못하고 도로변에서 판매하는 영세 상인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새로운 시전의 창설을 금하는 한편, 1741년(영조 17)에는 10년 내에 신설된 시전을 혁파하라는 논의가 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실제 혁파된 시전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시전 상인의 영세 소상인 수탈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 이 바로 금난전권의 완화를 주 내용으로 하는 통공 정책이었다.

1741년(영조 17)에는 시전의 규모와 국역 부담이 큰 시전의 난전은 엄금하고, 규모나 국역 부담이 적은 시전의 난전은 허락하였다. 금난전권의 행사 지역도 한양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 안으로 제한하였으며, 시전 상인의 난전 착납 금지를 재차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공 조치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1751년(영조 27) 한성 판윤 홍상한(洪象漢)이 다시 육의전 등 큰 시전의 난전은 엄금하고 그 밖의 잡전은 난전을 금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건의하였지만, 이 조치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후 1755년(영조 31)에 한성 좌윤 한익모(韓翼模)가 종이나 어물 등 소소한 물종의 난전에 대해 통공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시전 상인들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1764년(영조 40)에는 보민사(保民司) 설치를 계기로 육의전을 비롯한 17개 시전에 대해서만 금난전권을 인정하고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은 부정하는 대폭적인 통공 정책을 취하였다. 즉, 원래 한성부에서 직접 난전을 금하던 육의전을 포함한 9개 시전은 종전대로 한성부에서 난전을 금하고, 어물전을 포함한 8개 시전은 시전 상인이 직접 난전인을 착납하도록 하였으며, 나머지 시전에 대해서는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68년(영조 44)에는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부정하는 통공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의 초기 통공 정책은 물가 앙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나아가 시전 상인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곧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786년(정조 10)에도 한 차례 통공 조치를 내렸지만 곧바로 철회하였다. 이처럼 계속된 정부의 통공 정책은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을 제외하고는 시전 상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그다지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동안 운영되어 오던 시전 체제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육의전을 제외 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함으로써 한양의 물가를 안정시키고, 소시민의 생활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그동안 시전 상인들은 국역 부담을 이유로 상품에 대한 독점권을 소유하였고, 이를 토대로 시가보다 훨씬 비싸게 물건을 판매할 수 있었지만, 신해통공을 계기로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권은 부정되었다. 그러나 1791년의 강력한 통공 조치도 19세기 이후 부터는 점차 완화되어 육의전 외의 다른 시전에게도 금난전권을 허용하고, 독점적 유통권을 부여하는 조치가 뒤따랐다.25)김동철, 「채제공(蔡濟恭)의 경제 정책에 관한 고찰-특히 신해통공 발매론(辛亥通共發賣論)을 중심으로-」, 『부대사학』 4, 1980 ; 한상권, 「영조·정조의 새로운 상업관과 서울 상업 정책」, 『서울 상업사』, 태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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