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2. 시전 상업의 시기적 변화
  • 도성 3대 시장과 경강 상업
  • 상권 확대와 유통 체계의 변화
고동환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은 육상뿐 아니라 해상의 교통도 크게 발달시켰다. 그 결과 육지의 장시 시장권은 대장시(大場市)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으며, 포구 시장권 또한 대포구(大浦口)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이와 같은 장시 시장권과 포구 시장권이 결합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전국적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도성 주변의 수원, 안성, 개성 같은 도시가 한양의 배후 도시로 성장하였고, 도성 외곽에는 누원점과 송파 장시 같은 새로운 유통 거점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 과정에서 확대된 한양 상권은 상품 유통 체계를 변화시켰다.

원래 한양의 유통 체계는 구매·판매 독점권을 장악한 시전 상인을 정 점으로 형성되었다. 즉, 시전을 정점으로 하는 상품 유통 체계(시전 체계)는 향상·선상-여객 주인-시전 상인-중도아-행상-소비자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이러한 상품 유통 체계는 시전 상인이 갖는 금난전권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시전을 정점으로 한 유통 체계는 18세기 후반 종로의 시전 상가 외에 이현과 칠패 시장이 중요한 시장으로 부각되는 동시에, 한양 외곽에 송파와 누원 등이 새로운 유통 거점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여객 주인, 중도아, 한양의 사상 세력은 시전 상인을 능가하는 자본력으로 송파장, 누원점 등을 근거로 도고 활동을 벌이면서, 독자적인 유통망을 구축하였다. 예컨대 누원점의 상인들은 안으로는 한양의 중도아와 손잡고 밖으로는 송파 장시의 상업 세력과 연결해 한양을 경유하지 않고도 함경도 지역의 상품을 전국 각지로 분송하는 유통 체계를 형성하였다.

칠패의 중도아나 송파장과 누원점의 부상들은 송우장·누원점-송파장·사평장-한양의 칠패·이현-소비자로 이어지는 유통로와 송우장·누원점-송파장·사평장-인근 장시로 이어지는 유통로를 개발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시전을 정점으로 한 유통 체계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유통 체계를 통해 상품을 거래하였다. 새로운 유통 체계 담당자들은 권세가와 연결된 사상 대고나 기존 시전을 정점으로 하는 유통 체계의 하부에서 상업 행위를 하던 여객 주인, 중도아층이었다. 이들 가운데 새로운 유통 체계를 장악한 세력은 송파 등 신흥 상업 도시의 부상대고(富商大賈)로 이들은 대부분 경강 상인 출신이다.

새로운 유통 체계는 생산지에서부터 소비지까지 모든 유통 체계를 부상대고가 장악하여 판매하는 것이다. 그것은 봉건 권력이 부여한 구매 및 판매 독점권에 근거하여 판매하는 ‘염가 늑매(廉價勒買, 특권을 통해 시가보다 훨씬 싸게 구매)’의 방식이 아니라, 상당한 자본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무천매귀(貿賤賣貴, 싸게 구입하여 비싸게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생산지에 서 한양까지 이어지는 모든 유통 체계를 장악함에 따라 가격 조절 능력도 크게 향상되어, 이들은 상업 이윤을 최대한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유통 체계는 시전 상업과는 다른 사상 체계(私商體系)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이 구축한 유통 체계는 환전책(換錢冊)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거래액도 한 달에 4,000∼5,000냥, 1년이면 수만 냥에 이르렀다. 이는 새로운 유통 체계가 우연히 발생하여 일시적으로 가동된 현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발생하여 체계적·항상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새로운 상품 유통 체계는 사상층의 참여와 더불어 도성 안의 전통적인 상업 중심지 이외에 한양 주변에 새로운 유통 거점 창출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사상 체계의 성립은 무엇보다 시전 상인에게 종속되었던 한양의 상품 유통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부정한 신해통공은 바로 이와 같은 유통 체계의 변화를 정부 당국에서 추인한 것임과 동시에, 사상을 정점으로 하는 유통 체계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30)고동환, 『조선 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이러한 유통 체계의 변화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 1833년(순조 33)에 발생한 한양의 쌀 폭동이다. 쌀 폭동은 경강의 여객 주인 김재순(金在純)이 미전(米廛) 상인들을 지휘하여 쌀을 시장에 유통시키지 않자, 빈민들이 돈이 있어도 쌀을 구입할 수 없게 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한양의 미곡 상인들은 전해에 큰 흉년이 들어 쌀값이 오를 기미를 보이자, 경강 여객 주인들에게 도성 안팎의 싸전 상인들에게 통보하여 곡식을 감추고 팔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쌀의 유통이 일시에 끊기자 값이 폭등하여, 불과 열흘 사이에 쌀값이 두 배나 올랐다. 쌀값이 더 오를 것을 기대한 상인들은 아예 싸전을 닫고 한 톨의 쌀도 판매하지 않았다.

1833년 3월 8일 싸전이 일제히 문을 닫아 미곡을 구입할 수 없게 되자 한양의 빈민들은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호위군관(扈衛軍官) 김광헌(金光憲)과 고억철(高億哲), 홍진길(洪眞吉), 강춘득(姜春得), 우범이(禹範 伊), 유칠성(劉七成)과 노비 범철(範哲)의 주도 아래 상당수 도시 빈민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폭리를 취하기 위해 쌀을 쌓아 두고도 판매하지 않은 도성 안팎의 싸전과 경강에 미곡을 쌓아 놓은 집들도 불태웠는데, 모두 15호에 달하였다.

폭동 초기에 경기 감영의 병력을 경강에 파견하여 제어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어서, 좌·우포도청의 교졸(校卒)을 풀어서 강경하게 진압함으로써 폭동은 겨우 가라앉았다. 폭동을 주도한 일곱 명은 목이 잘리는 극형에 처해졌고, 미가 폭등의 원인을 제공한 상인들 중에서 경강 여객 주인 김재순과 하미전인(下米廛人) 정종근(鄭宗根)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하미전인 이동현(李東顯)과 잡곡전인(雜穀廛人) 최봉려(崔鳳麗)에게는 엄한 형벌을 가한 후에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는 한양의 미곡 유통을 시전 상인이 아니라 경강 여객 주인이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31)『비변사등록』 221책, 순조 33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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