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4. 시전의 조직과 영업 구조
  • 시전의 영업 구조
  • 도가와 시전 행랑
고동환

시전은 도중의 사무실인 도가와 상품 거래가 이루어진 시전 행랑으로 구성된다. 도소로도 불리는 도가는 시전 도중의 본부로, 도중의 사무실이면서 각종 회의가 열리는 장소였고, 상품의 보관 창고 구실도 겸하였다. 그 당시 한양 시전 도가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려 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한양 시전 도가의 모습을 살펴보면, 1884년에 모리스 쿠랑(Morice Courant)이 파리에서 출판한 『한국서지(韓國書誌)』 서론에 ‘광통교 근처에 중요한 상인 조합의 본거지인 대여섯 채의 2층집’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주요 시전의 도가 건물은 2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6)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한국 서지-수정 번역판-』, 일조각, 1994, 3쪽. 반면 포전 도가는 65평 규모의 1층 목조 기와집으로 포전 도가(布廛都家)라는 간판을 달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4년(고종 1) 화재로 불에 탄 면주전은 도가 50칸과 좌시수직방(坐市守直房) 40칸을 합하여 모두 90여 칸 규모였다.

도가는 상품의 보관 창고 기능도 겸했으므로, 입전에서는 특별히 도가접주인(都家接主人)을 두어 지키게 하였고, 물건이 도난당하면 도가접주인이 배상 책임을 졌다. 입전과 달리 포전에서는 도가의 수직인을 따로 두지 않고, 밤에 도원들이 돌아가면서 숙직을 하는 형태로 도가를 관리하였다.

시전 상인들의 영업장은 전, 공랑, 행랑 등으로 불리는데, 조선 초기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국가에서 종로 일대에 2,000여 칸 규모로 건설한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건설한 시전 행랑 건물이 조선 후기까 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못하였다. 도중에 화재로 소실되거나 낡아서 신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간에서 자본을 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대개 부민(富民)이 비용을 대서 시전 행랑을 건축하고, 그 대가로 시전 상인에게 일종의 임대료를 받았다. 이처럼 행랑 건축에 국가 재정을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조선 초기와 달리 17세기 후반에는 시전 행랑에 대한 수세도 없어졌다.

시전 행랑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18세기 이후 시전의 화재를 언급한 기록에는 시전 행랑의 규모가 단편적으로 밝혀져 있는데, 1771년 화재로 소실된 의전의 규모를 보면 기와 16칸, 초가 7칸으로 모두 23칸 규모였으며, 면주전·면포전·망문상전 세 개의 시전에 소속된 건물이 수백여 칸에 달하였다. 또한 1840년(헌종 6) 종로 운종가의 큰 화재 때에 저포전의 소실 건물이 133칸, 진사전은 50칸, 상전이 120칸, 입전은 본청만 50칸에 이르렀고, 1844년(헌종 10) 종로 시전 화재 때 소실된 면주전 행랑은 80여 칸에 이르렀다. 이로써 육의전의 행랑 규모는 적어도 100칸 안팎이었고, 소소한 시전도 20∼30여 칸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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