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4. 시전의 조직과 영업 구조
  • 시전의 영업 구조
  • 영업 방식
고동환

시전 상인은 상품을 어떻게 판매했을까? 1880년대에 한양을 방문한 길모어(G. W. Gilmore)는 상거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만일 방문객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거리를 산책한다면, 모습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심 아침 시장의 떠들썩한 소리가 귀에 들리고, 거리 중간에 나무로 만든 진열대 위에 놓인 건어물, 과일, 채소, 쌀 등 조선의 다양한 식품이 팔리는 것을 볼 것이다. 상인들은 매우 부지런해서 여름에는 새벽 5시에서 6시까지가 성시를 이루는 시간대이다. 8시나 그보다 좀 지나면 거리 위에 둔 썩기 쉬운 물품들을 모두 거둬들여 가게나 상점 안에서 매매가 이루어져야 한다.37)G.W. 길모어, 신복룡 역주, 『서울 풍물지』, 집문당, 1999, 47쪽(원저 : Korea from its Capital with a Chapter on Mission,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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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채소 시장
남대문 채소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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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보면 채소나 건어물 등 농수산물의 거래는 매우 이른 시간에 이루어졌으며, 비단이나 면포 등 썩지 않는 수공업 제품 등은 낮에 상점 안에서 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시장에서 거래는 주로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들이 행하였다. 양반들은 상인과 흥정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대개 하인을 시켰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이러한 관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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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길
저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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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비록 부리는 하인 한 명 없는 집안의 가난한 선비일지라도 아직 자기 발로 장터에 나가 막 굴러먹은 장사치들을 상대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은 좀스럽고 더러운 일로 치고 있다.38)박지원, 이상호 옮김, 『열하일기』 하, 앙엽기(秧葉記) 융복사(隆福寺), 보리, 2004, 394쪽.

그러나 이는 상가의 일반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구체적인 상품 판매 방법은 시전에 따라 현저하게 달랐으며, 농산물은 제철이 아니면 유통될 수 없었으므로 품목에 따라 유통 시기가 달랐다. 예컨대 배추와 순무 등 채소는 주로 음력 3월에 팔렸는데, 이를 판매하는 상인을 청근상(菁根商)이라고 하며, 이들은 배추와 순무의 새싹을 짊어지고 떼를 이루어 다니면서 소리쳐서 팔았다. 참외와 수박은 더위를 씻는 음식으로 여겼으며, 주로 음력 6월에 많이 팔렸다. 이현의 채소·과일 시장과 칠패의 생선 시장은 음력 6월이 가장 번성한 때였다. 또한 겨울철에 통영과 해주에서 잡힌 청어는 음력 11월경에 한양 경강에 도착하였다. 이때 생선 장수들이 내·외어물전이나 남대문 밖 칠패에서 어물을 구입한 다음 광주리에 청어를 담고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판매하였다.39)홍석모(洪錫謨), 이석호 옮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을유문고 25, 을유문화사, 1969.

반면 입전과 같이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는 시전은 주로 종로의 시전 행랑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렸고, 쌀과 같이 공급원이 매우 다양하고 수요가 광범한 상품은 여러 곳에 미전이 있어서 일반적인 사상과 다름없이 쌀을 판매하였다. 그리고 공급원이 서해나 동해 소산(所産)인 어물을 주로 취급하는 어물전은 상당히 다른 광경을 보인다. 여기서는 입전과 어물전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입전은 주로 개성 상인과 의주 상인 그리고 역관을 통해 상품을 구입하였다. 구입한 상품은 종로의 시전 행랑에서 판매하였다. 입전 상인들은 방 바로 앞에 붙어 있는 한 평 남짓한 퇴청(退廳)에 방석을 깔고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시전 상인들이 영업하는 공간은 매우 좁아서 상품 진열은 최소한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뜨내기손님은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종로 일대를 배회하게 마련이다.

이때 이 손님에게 큰 소리로 무슨 물건을 사러왔는가 묻는 사람이 있었다. 이는 시전 상인이 아니라 아직 자기 점포를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으로서, 손님을 시전 점포로 이끌고 가서 흥정을 붙여 거래가 성사되도록 도와 주었다. 이런 사람을 여리꾼이라고 불렀다. 또는 상품 진열장으로 안내한다는 뜻에서 열입군(閱入軍)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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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꾼 복원도
여리꾼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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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꾼은 시전 상인이 작정한 값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 주고, 그 차액을 챙겼는데, 그것을 여리(餘利)라고 하였다. 여리꾼은 특정 가게에 전속되어 임금을 받는 것은 아니므로 자기 몫을 챙기려면 주인이 책정한 가격을 미리 알아내서 그보다 비싼 값에 팔아야 하였다. 그러므로 손님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암호를 사용해 가격을 알아냈는데, 이 암호를 변어(弁語)라고 하였다. 변어는 주로 파자(破字)의 원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은 천부대(天不大), 2는 인불인(仁不人)과 같이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의 암호를 사용하여 손님 몰래 가격을 알아내어 그보다 높은 가격으로 흥정을 붙였다.40)『입전완의의의해석』, 경성육의전행용변어(京城六矣廛行用弁語).

한편, 어물의 유통은 비단 거래와는 달랐다. 당시 한양에서 유통된 어물은 서해산 어물과 동북산 어물(주로 북어)로 구분된다. 서해산 어물은 선상이 용산이나 마포 등 경강으로 가져오면, 경강의 여객 주인이 어물전 상인에게 배가 도착했음을 통보하고, 어물전 상인이 나와 어물 선상과 흥정하여 어물을 매입하였다.

이때 어물 선상과 어물전인 사이의 거래는 공정하지 못하여, 어물전인은 헐값으로 어물을 구입하려 하였다. 만약 어물전인이 제시한 값에 판매하지 않으면 어물 선상은 다른 곳에 마음대로 판매할 수 없으므로 앉아서 어물을 썩히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선상들은 대부분 손해를 보면서도 어물전에 어물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고, 어물전인은 이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불공정 거래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금난전권 때문이었다.

한편 동북산 어물은 함경도 연안에서 포획한 명태를 말린 북어가 원산에 집하되었다가, 의정부의 누원점막을 경유하여 육로를 통해 한양으로 반 입되었다. 이러한 어물의 한양 반입을 담당한 상인을 북상(北商) 또는 북어상(北魚商)이라고 불렀는데, 이들도 어물을 모두 어물전인에게 넘겨야 하였다. 이런 과정을 중개하는 사람은 동대문 안에 건립된 경모궁 근처의 여객 주인이었다. 이렇게 어물전에 집하된 어물은 어물전에서 직접 소비자를 상대로 판매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중도아나 어물 행상에게 분배되고, 이들 어물 행상이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집집이 판매하였다. 그러므로 어물전인은 개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것보다는 큰돈을 벌어 주는, 외부에서 반입되는 어물의 독점적 구매권에 훨씬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41)고동환, 「18세기 서울에서의 어물 유통 구조」, 『한국사론』 28, 서울대 국사학과,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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