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
  • 5. 조선 후기 한양의 도시 문화
  • 도시 문화의 발흥
고동환

새로운 세계를 추구한 이들 여항인이 향유한 ‘여항 문화’도 독특한 것이었다. 이들이 형성한 도시 문화적 양상은 문화 예술적 욕구의 증대와 유흥 문화의 발달로 대변된다. 여항인의 문화 예술적 욕구는 다양한 생활 취미를 추구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18세기 한양에는 집안 치레를 위한 그림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예컨대 김홍도의 그림을 구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 대문에 가득 찰 지경이었다. 또한 가옥, 그릇, 복식, 수레와 말 등의 사치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소나무나 매화 분재 따위에 광적인 취미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서민들 사이에 골동품 수장과 감상 취미가 생기고, 이런 수요에 응해 분재나 골동품 중개상도 출현하였으며, 도시민들 사이에 바둑, 화훼, 서책, 고검(古劍)의 수집 등 새로운 감각의 생활 취미가 생기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감각의 생활 취미 외에도 이들 여항인의 문화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유흥 문화의 형성이다. 18세기 한양에는 술집과 기방이 번창하고 도박이 성행하였다. 술과 매음을 업종으로 하는 색주가나 음식점이 번창하였다. 예컨대 군칠이라는 음식점에는 평양과 개성의 특미가 한양 음식점의 메뉴로 등장하였고, 밤에는 불을 켜놓고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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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18세기 후반경 한양의 주점들은 수십 가지 안주를 제공하여, 젊은이들이 술보다 안주에 몰려 술값으로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쇠고기와 어물의 절반 이상이 주점의 안주로 소비되어 한양 시민의 찬거리 값이 폭등하기도 하였다. 술집과 음식점의 발달은 17세기 이후의 현상이었다. 지방 교통의 요지에 주막이나 여각 등이 산재하였지만, 그 집중도와 수준에서 한양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상업적 외식업의 발달은 인구의 밀집과 유동을 전제로 한 도시 특유의 현상이다.

또한, 원래 기녀가 제공하는 각종 춤과 기악, 성악, 성적 서비스는 궁정과 관료를 위한 것이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소비층과 향유 방식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여항인이 새로운 향유층으로 등장하면서 시정에 기방(妓房)이 출현하였다. 여항 문화로서 기방은 기녀의 예능·술·성을 판매하는 곳이자, 도시민의 사교장이며 도박장이기도 하였다. 일종의 복합적인 유흥 공간인 셈이다. 기방의 주 고객은 상인, 서리, 액례, 역관 등 여항인으로 이들은 실제 기녀의 지배자였으며, 독특한 기방 문화를 조성한 주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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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유흥 문화는 많은 놀이를 만들어 냈다. 당시에 행해진 놀이로는 유산(遊山)놀음, 뱃놀이, 산대놀음, 승전놀음, 촉유(燭遊), 수유(受由)놀음, 화류놀음 등 종류도 매우 다양하였다. 또한, 행락 문화도 발달하였는데, 주요 행락처로는 한양 일대의 누정뿐만 아니라 인왕산 아래의 필운대, 세심대, 수성동, 옥류동, 북악 아래의 삼청동, 옥류동, 유란동, 백련봉, 북부 안국방의 화개동, 성균관 근처의 송동, 혜화문 밖의 북사동, 남산 아래의 산단, 창덕궁 서쪽의 몽답정 등 수많은 곳이 도시민의 유흥지로 등장하였다.

한양 도시민에게 거의 일상이 된 행락은 도시 특유의 문화 현상이었다. 행락은 부와 여가의 결합으로 발생한 오락 문화로서, 이를 위해서는 여가의 존재가 중요하다. 절대 다수의 농민이 토지에 매어 있던 것과 대조적으로 도시민은 애초 시간적으로 상당히 여유가 있었고,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로 생활에 필요한 소비재를 시장에서 공급받음으로써 가혹한 노동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여기서 창출된 여가와 부가 결합하여 새로운 행락 문화를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유흥 문화가 번성하면서 점차 유흥의 상업화 경향이 강화되었다. 한양 여항 시정의 도시민적 취미 내지 향락 소비 생활의 발전이 제 나름의 기예를 파는 일을 업으로 하는 예능인을 출현시켰다. 특히 산대놀이나 판소리, 도시적 음악인 세악(細樂)과 줄풍류가 발달하였다. 산대놀이는 원래 궁정과 관에서 주관하는 것이었으나, 18세기에 와서 궁정과 관은 공식적으로 손을 떼었다. 이로써 산대놀이는 위축된 것이 아니라 시정으로 활발히 진출하여 한양 시민이 가장 선호하는 관람 오락으로 발전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판소리와 산대놀이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이와 같은 유흥의 상업화 현상은, 곧 상품 화폐 경제의 원리가 예술 부문에도 적용된 것으로 풀이된다. 요컨대 한양 여항, 시정의 도시민적 향락 소비 생활은 예술의 상품적 수요를 창출하였다.49)강명관, 『조선 후기 여항 문학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7.

한편 이야기꾼들의 활동도 전문적인 예능으로 발달하였는데, 당시 이야기꾼의 활동 양상은 강담사(講談師), 강창사(講唱師), 강독사(講讀師)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50)임형택, 「18, 19세기 ‘이야기꾼’과 소설의 발달」, 『고전 문학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75. 강창사는 판소리 광대를, 강독사는 길거리에서 청중을 상대로 이야기책을 낭송하던 전기수(傳奇叟) 같은 부류를, 강담사는 담화조로 하는 이야기꾼이었다.51)조수삼(趙秀三), 『추재기이(秋齋紀異)』, 전기(傳奇), 『호산외기(壺山外記)』, 아세아문화사, 1974. 시정에서 이런 상설 공연을 하려면 유동 인구가 밀집하는 가로의 형성을 필수 요건으로 한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민의 경제력이 관람 오락을 발전시킨 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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