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1. 평양, 버드나무가 아름다운 유경
이철성

평양은 풍기(風氣)가 활달하고 진취적 기상이 뛰어난 땅이었다. 구한말에 평양 사람은 용감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옛 관습을 변화시키고 신학문에도 힘써 다른 도에 비해 문명개화에 가장 앞섰다는 평을 받았다.52)『황성신문』 1906년 3월 28일자. 당시 평양의 인구는 10만을 넘었고, 서울과 북경을 연결하는 육로 선상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 교통도 편리하였다. 그만큼 근대 기업과 상업이 발달할 여지가 컸다. 구한말 평양의 명성은 기독교가 가져다 준 결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평양을 한국의 소돔, 즉 죄를 많이 짓는 고을이라고 불렀다. 평양의 기방(妓房)이나 정월 대보름 석전(石戰) 등의 풍습이 서양 이방인에게 준 인상이다. 평양에는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기생을 중심으로 가무(歌舞)를 관장하던 기관인 교방(敎坊)이 있었던 곳이며, 빠르고 정확하다는 의미의 ‘평양 돌팔매 들어가듯’이라는 속담을 낳을 정도로 석전이 유명하던 곳이다. 이에 서양인에게 평양은 “무례한 일이 많고 성품이 강하여 다스리기가 어려운 지역”이었고, 그만큼 더욱 전도할 가치가 있는 지역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평양 출신 인사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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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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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양은 근세 산업과 기독교의 영향으로 갑자기 부상한 도시가 아니다. 평양은 단군, 기자, 위만이 도읍한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자 다시 동북아 역사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임금이 있는 평양성을 중국 당나라 수도에 비겨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불렀다.53)『신당서(新唐書)』 권220, 「동이열전(東夷列傳)」, 고려전. 고려는 도읍을 개경에 두었다. 하지만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한양을 남경(南京)으로,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만들어 예우하고 중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평양은 중국 주(周)나라에서 호경(鎬京)과 낙읍(洛邑)을 둔 제도와 비교하여 호경이라 불렸고 개경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54)『고려사(高麗史)』 권3, 세가3, 목종 1년 7월 계미. 평안도의 유래도 평양과 관련이 있다. 1413년(태종 13) 임금은 팔도의 이름을 결정하면서 평양과 안주(安州)가 이 지역의 핵심 고을이므로, 한 글자씩 따서 평안도(平安道)로 하라고 지시하였다. 평양은 역사 도시이자 평안도 전 체의 핵심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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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문(七星門)
칠성문(七星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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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평양 사람에 대한 평가도 줄을 이었다. “예로부터 배우기를 즐겨하여 궁벽한 마을의 미천한 집에서도 서로 삼가고 힘쓰며, 고을에는 경당(扃堂)을 지어 놓고 젊은 아이들이 경서를 읽는 풍습이 있었다.”55)『여지도서(輿地圖書)』, 평안도 평양부 풍속. “성품이 온후하고 진중하며 올곧아 선(善)으로 인도하면 쉽게 좇아 감화되고, 엄하게 몰아붙이면 부국강병의 토대를 이룰 수 있다.”56)『양촌집(陽村集)』 권12, 「평양성대동문루기(平壤城大同門樓記)」. “명망 있는 사람들이 산업을 즐겨 한다.”57)『목은고(牧隱藁)』, 「문고」 권1, 「서경풍월루기(西京風月樓記)」. 평양은 교육, 문화뿐 아니라 산업도 발달한 기품 있는 도시였다. 평양은 버드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뜻에서 유경(柳京)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었다.58)방린봉 외, 『조선 지명 편람·평양시』, 박이정, 2001. 평양 상인을 유상(柳商)이라 부른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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