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2. 평양의 번영, 유상과 평안도 상인
이철성

평양 감사는 권력과 부(富)의 상징이었다. “제 배부르니 평양 감사가 녹두알같이 보인다.”는 속담은 그래서 나왔다. 먹는 것에 걱정이 없으니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다는 의미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평양에는 한양 다음가는 인구가 모여 살았고, 토지는 전국 행정 단위 가운데 가장 넓었다. 『택리지(擇里志)』에서도 평양은 안주(安州), 경주(慶州), 상주(尙州), 전주(全州) 등과 더불어 조선의 대도회(大都會)로 꼽혔다. 그러나 평양부 전체가 도시는 아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평양부는 부방제(部坊制)에 따라 편성되었다. 평양을 4개의 부(部)로 나누고 그 밑에 하부 단위로 부방(部坊)을 두었다. 부는 평양의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인·의·예·지 등 유교의 명칭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인(仁)이 흥한다는 뜻의 인흥부(仁興部)는 평양성 안과 성 밖 서, 남, 북쪽 10리 영역이었다. 의(義)가 흥한다는 뜻의 의흥부(義興部)는 인흥부 서쪽에서 서해까지를 포괄하였다. 예(禮)가 안정되었다는 뜻의 예안부(禮安部)는 대동강 동쪽 중화군과 상원군 경계까지의 지역이었다. 지(智)가 안정되었다는 뜻의 지안부(智安部)는 인흥부의 북쪽 순안현, 강동현까지의 지역이었다. 이들 4부 밑에 각 부방이 있었는데, 『여지도서』에는 36방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인흥부의 융덕부방(隆德部坊)·대흥부방(大興部坊)·내천덕부방(內川德部坊)·외천덕부방(外川德部坊)·임원방(林原坊)이 도시부를 이루었다. 모두 평양부 관아에서 1리 거리에 존재하던 지역으로, 평양부성(平壤府城)이 중심 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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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의 평양부성
『해동지도』의 평양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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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 『호구총수(戶口摠數)』에서 전국 각 도회 지역의 인구를 추정한 연구에 따르면 평양 도시 인구는 2만 1,869명, 1㎢당 인구 밀도는 3,359.3명이었다.59)손정목, 「이조 시대의 도시 규모와 그 국제 비교」, 『도시 문제』 9∼10, 1974. 한양의 경중(京中) 5부(部) 인구가 18만 9,153명, 1㎢당 인구 밀도가 5,228.1명이었던 데 비하면 현격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평양은 개성에 이어 전국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도시였다. 개성은 수원(水 原)·강화(江華)·광주(廣州) 등 한양과 가까운 유수부(留守府)로서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평양은 지방 도시로서는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셈이 된다.

평양부의 중심 시장은 관전장(館前場)이었는데, 한양·개성·전주·의주 등과 같이 시전이 즐비하였다. 시장에서는 쌀·콩·보리 등의 곡물류, 비단·면포·저포 등의 옷감류, 사기·옹기·유기 등의 그릇류, 각종 잡화류와 종이·땔감·석탄 등이 쌓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는 평양이 감영이 있는 행정 도시이며 인구 밀도가 높은 소비 도시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양의 상업 발달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육상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점이다. 신경준(申景濬)이 쓴 『도로고(道路攷)』에 따르면 18세기 조선에는 6대로(大路)가 있었다. 서울-의주, 서울-경흥(慶興), 서울-평해(平海), 서울-동래(東萊), 서울-제주, 서울-강화를 잇는 대로(大路)가 그것이다. 대로는 더욱 분화되어 19세기 전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와 『도로고』에서는 7대로가 되었고, 19세기 후반 『정리고(程里考)』에서는 10대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경제를 잇는 동맥은 서울-의주 대로였다. 서로(西路)라고도 불린 서울-의주 대로는 곧바로 서울-동래로 연결되는 조선의 간선 도로이자, 동시에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국제 연결 도로였다.

이에 조선의 무역 상인들은 의주-서울-동래를 잇는 대로상에서 출현하였다. 18세기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부유한 상인이나 큰 장사치는 앉아서 재화(財貨)를 움직여 남쪽으로는 일본과 통하며 북쪽으로는 연경(燕京)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끌어들여 더러는 수백만 금의 재물을 모은 자들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또 다음은 평양과 안주이다.”라고 하였다.

같은 이야기는 19세기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에도 이어진다. “재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교역을 하 면 반드시 재물을 얻는 법이다.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수백만 금을 벌어들인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한양에 가장 많고 다음이 개성이며, 그다음은 영남의 동래와 밀양 그리고 관서의 의주·안주·평양에 많다. 그 모두가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상에 있어 국내 상업보다 배의 이익을 얻고 있다.”고 하였다.60)『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예규지(倪圭志) 권2.

‘앉아서 재화를 움직여 중국·일본과 무역하는 상인’은 대자본의 무역 상단을 거느리는 조선의 거상이자 전국적 유통망에 연결되는 상인층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곧 서울의 경상(京商), 개성의 송상(松商),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내상(萊商), 평양의 유상(柳商)이었다. 평양의 유상이 무역 상인으로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과 하는 공식 무역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압록강의 중강(中江)에서 열리던 무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유상은 17세기 이후 안주·용천 상인과 더불어 중강 무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인이었다.

두 번째는 중국으로 들어가는 사행(使行)의 일원으로 따라가 책문(柵門)·심양 무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1728년(영조 4)에 무역 별장제(貿易別將制)가 혁파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가능하였다. 서로(西路)상의 평안 감영·평안 병영·개성부·황해 감영·의주부 등은 중국으로 가는 사행 편에 무역 별장을 파견할 권리가 있었다. 무역 별장은 각 관아의 무역을 대행하던 상인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상인이 뽑혔다. 자연히 평양 상인에게도 심양 무역과 책문 무역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무역 별장제가 혁파된 이후 사행 무역에 참여하는 상인에 대한 조선 정부의 공식적 태도는 역관(譯官)과 만상(灣商)에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18세기 중반 이후 역관은 경상과 연결되고, 만상은 송상과 연결되는 경쟁 관계를 보이게 된다. 만상과 송상은 서상(西商)으로 지칭되기도 했는데, 유상은 이들과 연합하여 중국 무역에 자금을 투자하고 수입 물품 판매 에 참여함으로써 무역 이익을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상이 무역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은 위험을 감수하고 밀수출과 밀수입을 감행하는 것이다. 1807년(순조 7) 유상 이사즙(李士楫)과 만상 백대현(白大玄)은 미곶진 앞바다 신도(薪島)까지 배를 타고 나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청나라 상인에게 쌀 120석을 불법적으로 팔아넘기고, 물건값으로 은화를 비롯하여 중국돈(唐錢), 놋쇠, 각종 그릇 등을 받았다. 이들은 물건을 평양 시장에 팔아넘기려고 대동강으로 배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관원에게 적발되었다. 평양은 각종 밀수품을 팔아넘길 정도의 시장 구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평양 상업 발달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평양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 평안도 장시(場市)와 밀접히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전국 상품 유통권과도 연결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평안도는 청천강(淸川江)을 기준으로 그 이남을 청남(淸南), 그 이북을 청북(淸北)이라고 하였다. 18세기 청남 지방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23개 고을이 있었으며, 청북 지방에는 의주·철산·정주 그리고 영변·구성 등 총 19개 고을이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평양으로 올라온 서로는 다시 평양에서 평안도 전 지역으로 펼쳐졌다.

특히 평양-안주-의주를 잇는 대로는 수레 사용이 추진될 정도로 정비가 잘된 도로였다. 1686년(숙종 12)에 평양·안주·의주에는 모두 800대의 수레가 제작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 그럼에도 수레는 경제성이 낮아 실제로 쓰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서로를 통해 각종 화물이 운반되면서 평안도 지방 장시가 행상과 잡화상에 의해 연결되고 있었다. 해로(海路)는 평안도 안의 시장권을 서로 연결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전국적 유통망을 연결하였다.

해로의 이익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이중환은 “온 나라 장사꾼이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고 다니나 목적지가 멀면 비용이 많이 들어 이익이 적다. 그러므로 배에 물자를 실어 교역하는 이익이 더 많다.”61)『택리지(擇里志)』, 팔도총론(八道總論).고 하였다. 정약용은 “강과 바다에서 다니는 배가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데, 일상의 온갖 물건은 배 아니면 메어 나르는 두 가지 방법뿐이니 배의 쓰임이 아주 중요하다.”62)『경세유표(經世遺表)』 권14, 균역사목추의(均役事目追議), 총론.고 하였다.

그러나 평안도 지방의 해상 교통에는 장산곶(長山串)이란 장애물이 있었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로 시작하는 몽산포 타령의 일부를 이루는 황해도 장산곶은 서해의 항로를 단절시키는 험탄(險灘)이었다. 이 장산곶이 극복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장산곶이 뚫리면서 해상 교통은 삼남(三南)과도 이어졌다. 18세기 중반 서울과 삼남의 해로를 막던 안흥량(安興梁)이 항해술이 뛰어난 경강 상인에게 완전히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8세기 후반에는 함경도 상인도 동해안에서 남해안을 돌아 서해안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평안도에서도 장시가 발전하면서 각 지역의 장시 사이에 개시 일자가 변동되고 상설 점포도 생겨났으며 상설 시장으로 자리를 잡은 곳도 있었다. 그런데 평안도 경제의 특징과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것은 놋그릇(鍮器)의 제조와 판매가 가장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19세기 놋그릇 사용의 현실을 이렇게 전한다. “놋그릇은 오직 왕가나 부호의 집에서나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궁벽한 촌집에서도 놋그릇 서너 벌은 있게 되었다.”63)『임원경제지』, 섬용지(贍用志) 권2, 취흔지구(炊釁之具).

종래 놋그릇 생산지는 서울, 개성, 전주 등 몇 군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7세기 무기와 동전 주조의 수요에 따라 이천(伊川), 안변(安邊), 수안(遂安) 일대에 동광이 개발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평안도 정주와 경기도 안성의 놋그릇 제조업이 기존에 있던 다른 지역을 압도하고 우리나라 굴지의 생산지라는 명성을 차지하였다.

납청정(納淸亭)은 정주와 가산의 경계에 있었다. 『계산기정(薊山紀程)』에 따르면 납청정은 명나라 사신 당고(唐皐)가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칙사가 통과할 때 말을 바꾸어 타던 곳이었다. 어느 땐가 그 정자는 허 물어졌고, 그 자리에 이곳의 백성들이 시장을 열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만주족 기병이 짓밟고 들어와 남김없이 노략질하였다. 사람들은 납청(納淸)이라는 이름이 혹 ‘청(淸)을 들인다.’는 일을 예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물건이 망가진 것도 납청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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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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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기정』이 1803년(순조 3)의 기록이므로 ‘백성들이 시장을 열었다’는 기록은 납청정의 유기 산업과 장시의 발전을 언급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는 박천 용계면 원산동에도 17군데에 유기 수공업장이 있었다. 여기서는 7첩 반상기, 5첩 반상기, 제기, 징, 요강, 대야 등을 생산하였다.

납청정에서 생산된 유기는 박천 진두장(津頭場)을 거쳐 배편이나 육로를 통해 평양을 비롯한 서북 지방 일대로 시장권을 넓혀 나갔고, 진두장에는 동(銅)을 구입하여 공급하는 전담 상인들도 등장하였다.64)홍희유, 『조선 중세 수공업사 연구』, 지양사, 1989. 1807년 밀수 상인으로 적발된 유상 이사즙과 만상 백대현이 청나라 동전과 놋쇠 등을 지니고 대동강으로 들어왔던 이유도 유기 산업과 시장권 형성과 무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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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루 연회도
부벽루 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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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평양 시장은 의주와 서울을 연결하는 서로상에 위치하여 동아시아 국제 무역권과 연결되는 동시에 평안도 경제권의 핵심으로 전국적 유통망과 연결되었다. 바로 그 중심에 평양 유상이 있었다. 그러나 평양 유상은 아쉽게도 조선시대 내내 그 모습을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현존하는 몇 장의 풍속화 속에서 유상이 없이는 불가능한 평양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평안 감사 향연도(饗宴圖)』 가운데 「부벽루 연회도(浮碧樓宴會圖)」는 공연에 참여하는 인원이 궁중보다 조촐하다. 그러나 처용무(處容舞), 무고(舞鼓), 검무(劍舞) 등 궁궐에서 벌이던 것과 같은 춤과 노래가 삼현육각(三 絃六角)의 반주에 맞추어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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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광정 연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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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광정 연회도(練光亭宴會圖)」에서도 삼현육각의 반주에 따라 사자무(獅子舞)가 공연 중이며, 계단 아래에서 학무, 연화대, 선유락 등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다.65)김은자, 「조선 후기 평양 교방의 규모와 공연 활동」, 『한국 음악사 학회』 31, 2003.

연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울긋불긋한 비단, 푸른색·붉은색으로 물들인 옷감으로 옷을 해 입고 있으며, 각종 악기와 장신구를 갖추고 있다. 각종 그릇과 깃발, 천막도 표현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평양의 상업적 번영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평양은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고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보내는 길목이었다. 이에 평안도는 각종 부세를 서울로 상납하지 않는 대신 이를 사신 접대와 부대 비용으로 저축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는 중앙 정부에 보고되지 않는 금광을 비롯한 각종 광산에서 거두는 수입도 있었다. 평안 감영이 있는 평양부의 부(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에 평안 감사와 사신들을 접대하는 연회는 궁중 연회의 품격과 수준을 갖출 수 있었다. 평양부의 연회는 평안 감사를 위해 열리는 것도 있었고, 평안 감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것도 있었다.

선화당(宣化堂)은 높고도 넓어

한낮에 성대한 연회 베풀었네

사군은 내 객고를 위안키 위해

술 권하고 노래 부르게 해서 긴 하루 보내네

울긋불긋 비단옷으로 꽃밭 이루어

기생은 애교 띠면서 두 줄로 벌려 섰네

향기로운 바람 따라 움직이는데

피리소리 북소리는 하늘로 울려 퍼지네

화고(畵鼓)는 춤추는 북채 받아서 울리고

공(毬)은 흐르는 별처럼 빠르게 날고 있네

한 쌍의 어린 기생 몸이 가벼워

춤추는 검이 허공에 높아 여름에 눈 흩날리네

이 천리 나그넷길 괴롭기도 하더니만

이 놀이 보는 순간 심신이 기뻐지네.66)이능화, 이재곤 옮김, 『조선 해어화사』, 동문선, 1992, 288쪽에서 인용.

선화당은 평안 감사가 집무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평안 감사가 찾아온 손님 채제공(蔡濟恭)을 위해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를 위해 감영에서는 각종 비단과 채색 옷감, 술과 음식, 그릇과 장신구 등 각종 물품을 평양 시장에서 조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양 상인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동강 물을 팔아 한양 상인을 골탕 먹인 민담 속의 봉이 김선달이 더 유명하다면 쓴웃음 나는 역설이 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평안도 상인으로 관직을 얻어 그 이름을 전하며, 근대 평양 상인의 계 보와 연결되는 징검다리 인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임일권(林逸權)은 납청정에 유기 공장을 여러 개 갖고 유기전을 운영하던 갑부였다. 거상이 된 상인은 관직을 얻어 또 다른 출구를 열게 마련이다. 그래서 얻은 관직이 박천(博川) 군수, 그래서 그는 임박천으로 통하였다. 오희순(吳熙淳)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재산으로 관직을 얻었다. 오삭주라 불린 것은 삭주(朔州) 군수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철산 오씨 부자라고 불린 그의 집안은 후대에도 갑부로 알려졌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평양 대성학교에 거금을 내놓아 명성을 얻었던 오치은(吳致殷)은 그의 아들이고, 오희원(吳熙源)은 그의 사촌이다.

민족 지도자로 오산 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의 핵심 인사로 활동한 이승훈(李昇薰)도 이들 임박천, 오삭주와 기연을 맺고 장사로 돈을 모은 상인이었다. 1909년 평양 자기 회사 창립 당시 총무였던 김남호(金南滈)가 1913년 이후 회사의 최고 경영자로 취임할 무렵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원래 부유하여 소가죽을 수출하고 주단포목(紬緞布木)을 수입 판매하는 무역상이었다. 개항 이전에 조선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과 식민지 초기를 살아간 평양 상인은 그래서 사회 구성체 논의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사적인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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