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3. 평양의 굴절과 비운
이철성

1876년 개항은 조선을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공간에 따라 변화의 조건과 강도는 서로 달랐다. 따라서 평양은 강화도 조약 직후 문호를 연 인천, 부산 등과는 다른 과정, 다른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굵직한 자취를 남겼던 평양에도 근대적 굴레가 씌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그것과는 시간과 조건에서 차이가 있었다. 평양의 변화는 청일 전쟁, 진남포 개항 그리고 평양 개시(開市)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어났다.

그 이전 평양에서는 일본 상인보다 오히려 청나라 상인의 활동이 더욱 왕성했다. 1882년에 청나라는 「조중 상민 수륙 무역 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통해 한성에 상점을 열 수 있는 권리, 의주·회령·책문·훈춘·지역 개시, 중국인의 한반도 내지 행상권 보장 등의 특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에도 서울에 머물던 원세개(袁世凱)는 정치적 실력을 행사하며 청나라 상인의 행상을 후원하였다. 이에 힘입어 청나라 상인은 충청도·경상도·전라도는 물론 개성과 평양에도 들어와 상업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 앞의 서해상에서는 청나라 밀무역 상인의 활동 도 빈번하였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청일 전쟁 이전인 1889년부터 몇 년 동안 청나라 상인의 밀무역 근절을 요구하면서 대동강 하구에 새 개항장을 열자는 교섭을 벌여 나갔다. 황해도와 평안도 중간에 개항장을 설치하여 한반도 서북부 지방으로 뻗어나갈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것이 일본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는 이홍장(李鴻章)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북 지방 진출 교두보 마련이라는 일본의 열망은 1897년 진남포가 목포와 함께 개항되면서 첫 실마리를 풀었다. 이는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리품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평양 자체를 개시장(開市場)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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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 전경과 등대
진남포 전경과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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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의 최대 격전지이자 승패를 좌우한 전투가 평양 전투였다. 1894년 9월 15일과 16일, 이틀에 걸친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 여세를 몰아 청나라 군대를 만주로 내몰았다. 청일 전쟁으로 청과 일본의 한반도 내 영향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청일 전쟁 당시 미국 선교사로 구한말 격동기 비극을 목격하고, 소설체 형식으로 조선의 상황을 알리려 한 어떤 책에서는, 당시 평양의 전투 상황을 매우 실감 있게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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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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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요
승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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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소설 주인공 승요)는 도심을 벗어나 도시 외곽으로 나가 보았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성문마다 도망치려는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등에는 짐을 지고 군인이 평양에 들어오기 전에 빠져나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인파로 송곳 하나 꽂을 틈이 없었다. 난폭하게 서로 떠다밀고 붙잡아 대며 아우성을 쳤다. ······ 피난민들의 흐름이 점차 밖으로 빠져나가자 이번에는 반대로 약탈자들이 도시 안쪽으로 움직였다. 성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온갖 사악한 자, 탐욕스러운 자들이 게걸스럽게 물건을 약탈하려고 몰려나왔다. 이들은 훔친 물건을 전리품인 양 인접한 곳으로 옮기고 은신처를 찾아 숨어 버렸다. ······ 포탄이 내 위쪽을 넘어서 둑에 있는 풀밭에 떨어지더니 요란한 굉음과 함께 파편을 튕겼다. 전투의 소음은 평양성의 사방에서 들려왔다. 포격 소리는 치열한 전투가 가까이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과 중국군이 일본군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평양성 안쪽으로 도망 쳐 온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 외곽의 요새는 무너진 상태였다. 밤이 가까워지자 청나라 군인들은 도시 안쪽에 있는 성벽 뒤쪽으로 집결해서 그곳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67)윤홍로, 「새로운 소설 자료 “이화(梨花)” 읽기-선교사가 본 구한말 사회, 청일 전쟁, 민비 시해를 중심으로-」, 『어문 연구』 101, 1999, 167∼169쪽에서 인용.

청일 전쟁은 역사·문화 도시이자 평안도 경제의 중심 도시인 평양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 대신 일본군을 따라온 500여 명의 일본 상인이 조선 사람의 빈집에다 진을 치고 장사판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본 상인은 대부분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 등으로 촉발된 배일 사상(排日思想)이 실력 행사로 노골화되자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는 1896년에 무장 행상단인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을 앞세워 다시 평양으로 진출하였다.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과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 등으로 복잡해진 정국을 수습한 뒤, 1895년 12월 목포와 진남포 개항과 평양 개시를 정식 거론해 왔다. 평양 개시는 목포나 진남포와는 달리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진남포를 개항했는데 평양까지 개시할 필요는 없다, 평양을 개시하면 조선의 상권을 빼앗길 우려가 있다, 또한 평양 개시는 조선 주요 도시를 잇따라 열게 되는 나쁜 전례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일본은 목포와 진남포를 개항시키고 나서 1898년 5월부터 평양 개시장을 위해 대한제국 각료를 개별 접촉하는 교섭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형식상으로는 평양 개시장 문제를 대한제국 정부가 발의하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평양에서 20㎞ 정도에 위치한 석호정(石湖亭)을 평양 개시장 후보지로 통고하였다. 그러나 석호정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곳을 평양 개시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은 진전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석호정 대신 평양성 밖 영제교(永濟橋)를 지정하였다. 하지만 이도 평양 성안이 아니라는 반대에 부딪쳤다. 다시 정부는 정해문(靜海門)에서 성 밖 우양관(又陽關)에 이르는 도로의 북쪽 일대를 제시하였지만, 이도 각국 사신 회의에서 부결되어 버렸다. 결국 평양 개시장 후보지를 두고 팽팽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공사 하야시 곤노스케(林權助)는 각국 사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부득이 각국은 평양을 잡거지(雜居地)로 간주한다.”는 강압적인 성명을 밝혔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에 대한 공식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을 비롯한 영국, 독일, 미국 등 각국의 사신은 평양을 잡거지로 인정한다는 통고를 차례로 보내기 시작하였다. 서구 열강은 평양성 내외가 외국인의 잡거지임을 일방적으로 통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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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평양 모습
개화기의 평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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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개시장에는 서구 각국도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평양 진출에 가 장 열성을 보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평양은 진남포 항구의 배후 도시로 서북 지방 최대의 내륙 도시이며, 만주 진출의 발판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은 평양성 밖에 옛 시가지와는 구별되는 일본인 신시가지를 조성하였다. 이를 위해 경의선 철도의 평양역도 성 밖에 자리 잡았다. 1906년 경의선 완공으로 일본 상인은 평양역을 통해 서울과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안도 내 유통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식민지시대 평양의 번영은 그래서 일본인의 것이었다. 『개벽(開闢)』은 식민지시대 평양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였다. “일본 사람은 평양을 조선의 오사카(大阪)라고 하였다. 그러나 평양을 가는 사람으로 한번 대동강의 건너편을 본다면 그 대안의 이상한 발전에 악연(愕然)하리라. 그런데 그것은 순 일본인의 경제적 활동의 실적이다.”68)『개벽』 30, 12월 1일 평양의 생산 방면,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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