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5. 의주, 해동제일관
이철성

의주(義州) 남문 이층 높다란 누각에는 조선의 첫 관문이란 뜻을 가진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이란 다섯 글자 현판이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말 그대로 의주는 조선의 국경 도시이자 중국으로 통하는 첫 고을이었다. 국경에 위치한 외교 관문이요, 국방상 요충지였으며 동시에 무역의 거점이었다. 압록강 일대는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이 있던 역사의 중심부이다. 하지만 의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때이다. 12세기 고려 예종 때 요(遼)나라 자사 상효손(常孝孫)과 도통 야율령(耶律寧)이 금(金)나라의 공격을 받아 도망하면서, 고려 영덕성(寧德城)으로 문서를 보내 압록강 일대의 땅을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우리 군사가 그곳으로 들어가 무기·돈·곡식 등을 거둬들였는데 임금이 기뻐하며 의주 방어사를 임명했다고 한다.78)『고려사』 권14, 세가14, 예종 12년 3월. ‘의로운 고장’ 의주라는 지명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여전히 이 지역을 용만(龍灣)이라고 불렀다. 압록강이 북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남쪽으로 이어져 의주의 삼면을 안고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 모양이 활을 당긴 것과 같다 하여 지명에 ‘만(灣)’이 붙었다고 한다. 의주부를 만부(灣府), 의주 상인을 만상(灣商)이라 부르게 된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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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남문
의주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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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는 조선시대에도 평양, 안주와 함께 평안도의 대도회로 중시되었다. 국경 방어의 요충지였고, 외교 사신이 오가는 직로(直路)상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의주의 중심부는 주내면(州內面)이다. 1789년 『호구총수』에서 주내면의 인구는 1만 837명이었다. 인구로만 따지면 한양, 개성, 평양 등에 이어 여덟 번째 도시가 된다. 도심부 인구 밀도를 추정한 연구에 따르면 의주의 인구 밀도는 1㎢당 214.4명이었다. 평안도에서 평양, 정주, 선천에 이어 네 번째였다.79)손정목, 「이조 시대의 도시 규모와 그 국제 비교」, 『도시 문제』 9∼10, 1974.

그래서 조선시대 이곳에 왔던 사람들은 ‘구석진 의주’라는 선입견을 떨치고 그들의 심정을 기록에 남겼다. “우리나라 서쪽의 먼 변방이로되 땅 기운이 상냥하고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조금도 황량한 느낌이 없었다.” 또 한 시가지와 민가가 “그득하게 고기 비늘처럼 늘어져 있는 변경의 웅대한 도회”라고 했다.80)『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권1, 무오년(1798) 11월 8일 ; 『계산기정(薊山紀程)』 권1, 출성(出城), 계해년(1803) 11월 12일. 의주는 관문(官門)에서 다섯 갈래로 큰 길이 연결되었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따라 10리를 가면 압록강이 나왔다. “압록강이 천연의 해자(垓子)를 이루었다.”81)『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53, 평안도 의주목, 형승.라고 하듯 국경 방어의 최일선이다. 관문에서 동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 판막령(板幕嶺)을 넘으면 삭주이다. 이 길은 압록강을 따라 이어지는 국방의 요충지 일곱 고을, 곧 의주·삭주·창성·벽동·이산·위원·강계를 잇는 길이다. 관문 남쪽 대로(大路)는 양책참(良策站)으로 이어졌고, 서쪽 대로는 용천의 선교(船橋)까지 연결되는데, 이 길이 철산·선천·곽산·정주 등으로 이어졌다. 동남쪽으로는 극성령(蕀城嶺)을 넘어 구성에 이르는 큰길이 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궁벽한 촌이 아니라 내륙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회지였다. 이에 의주는 흔히 사람의 몸 중에서 인후(咽喉), 즉 목구멍에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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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부의 도로와 연결망
의주부의 도로와 연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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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은 「압록강에 배를 띄우고서」라는 시에서 천혜(天惠)의 해자인 압록강을 노래하였다.

나라에 지세가 험한 곳이 있으니

하늘은 지리를 용케도 나누었네

세 강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외길로는 가도가도 닿기 어려워

물결은 넘실넘실 바다에 이어지고

바람 불면 파도는 허공을 치네

작은 배 빨라 화살 같으니

탈 없이 건넌 것은 사공의 덕일세.82)『양촌집』 권5, 「압록강 범주(鴨綠江泛舟)」.

미묘한 외교 관계에 있는 명나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자신의 서정을 담은 시이다. 권근만이 아니었다. 이후 중국으로 가는 사신으로 의주를 오간 사람들도 변경 도시 의주의 특성을 시로 남겼는데, 대부분 국방의 인후, 의주에 대한 감회를 읊은 것이다.

국경 문고리 닫아 용만 지키니

천하 동쪽 조선의 첫 관문이네

토끼 쫓던 오랑캐 아이 저물녘 돌아가고

봉화 연기 퍼렇게 불두산에서 피어오르네.83)『계산기정』 권1, 출성, 계해년 11월 12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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