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6. 국경의 무역 도시
이철성

의주부 장시는 읍장(邑場)이 중심을 이루었다. 읍장은 남문 밖에서 1일과 6일에 열렸는데, 곡물류·견포류·가죽류·금속류·해산물 등이 거래되었다. 청나라로 들어가던 사행도 이 시장에서 음식이며 필요한 물건을 사갔다. 18세기 후반 『용만지(龍灣誌)』에는 그 밖에도 석교장(石橋場)·산성장(山城場)·인산장(麟山場)·창령장(倉嶺場) 등이 보인다. 그러나 의주의 상업은 국내 교역보다 국제 무역이 더 중요하였다.

중강 무역(中江貿易)은 국경 도시 의주를 국제 무역 도시로 바꾸는 중요한 요소였다. 중강은 어디를 말하는가? 중강(中江)이란 명칭은 압록강이 세 가닥으로 갈라져 흐른 데서 기인한다. 압록강은 그 강물이 오리의 머리(鴨)처럼 푸르다(綠)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백두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강물은 의주 북쪽 경계에 이르러 몇 갈래 길로 나뉘었다가 합치기를 반복한다. 강에 위치한 크고 작은 섬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섬들은 여름과 가을에는 강물이 불어나 잠기기도 하고 섬이 육지와 연결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섬이 어적도(於赤島)와 검동도(黔同島)이다. 『연원직지(燕轅直指)』에는 “어적도에서 갈린 물줄기를 의주에서부터 소서강(小 西江)·중강(中江)·삼강(三江)이라고 한다.” 하고 “봄가을로 개시가 여기서 열렸다.”고 하였다. 『해동지도』는 어적도를 중국으로 오고가는 길로 표시하였다.

이와는 달리 『여지도서』는 어적도(於赤島)에서 갈라진 물줄기의 “한 갈래는 남으로 흘러 돌아서 구룡연이 되는데 압록강이라고 한다. 다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서 서강(西江)이라 한다. 다른 한 갈래는 그 가운데로 흘러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어 “사신들은 검동도의 북쪽을 거쳐서 연경을 갔다.”고 해서 『연원직지』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서는 검동도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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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부 지도의 어적도
의주부 지도의 어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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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동도는 1605년(선조 38)에 명나라가 압록강 경계를 결정하는 비석을 세운 곳이기도 해서 더욱 주목된다. 어떻든 어적도와 검동도는 위화도와 더불어 압록강에 있는 큰 섬이었고, 땅이 기름지고 개간지가 많았다. 그러므로 중강 개시는 이들 섬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중강 개시는 조금은 엉뚱하게도 임진왜란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지만, 일상을 꾸리기 위한 시장은 전쟁 중에도 열렸다. 물론 시장의 규모는 도성의 경우에도 곡식·생선·채소 등 생필품이 거래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 통에도 큰 장사를 하는 상인은 있게 마련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사를 따라 들어온 명나라 상인이 있었다. 이들은 명나라 군대를 위해 군량과 군수 물자를 조달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군량을 싣고 들어오면서 중국 비단과 은화도 팔아 무역 이익을 챙기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비단과 은화를 흡수할 만한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정을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중국에서 보내온 은화와 푸른색 비단·꽃무늬 융단 등의 물건으로 군량을 무역하라는 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푸른색 비단이나 꽃무늬 융단은 추위를 막는 물건이니 시가에 따라 값을 쳐 무역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싫어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곳에서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또한 중국 은화 값이 너무 높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역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양 서쪽 지방에서는 의주와 강상(江上)에서 매매하는 일이 있으므로 평안도에는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84)『선조실록』 권93, 선조 30년 10월 경오.

명나라 군대와 함께 진출한 상인은 산서(山西) 상인으로 알려지고 있 다.85)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 관계』, 역사비평사, 1999. 진상(晉商)이라고도 불린 산서 상인은 휘상(徽商)·섬상(陝商)·산동상(山東商) 등과 함께 명․청시대 중국의 10대 상방(商幇)으로 꼽히는 상인 집단이다. 산서 상인은 청대에도 금융 기관인 표호(票號)를 창설하고 중국 전체의 환전 업무를 독점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그들은 관료와 결탁된 군상(軍商) 활동으로도 유명하였다.86)寺田隆信, 張正明 等 譯, 『山西商人硏究』, 山西人民出版社, 1986. 그런데 이들이 조선에서 은화를 유통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지역은 평양 서쪽 지방 의주와 압록강 지역뿐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군량 조달 문제는 조선 정부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이 무렵 조선은 잦은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다. 여기에 전쟁이 터지자 조선군과 명군의 군량미 확충이 현안 과제로 등장하였다. 이것이 1593년(선조 26) 중강에 무역 시장을 연 배경이었다. 중강 개시를 통해 조선은 곡식, 나귀, 노새 등을 명나라에서 수입하고 그 무역 대금을 은화, 말, 면포 등으로 결제하였다. 또한 조선은 중강 개시에서 화약을 밀수입하는 한편 인삼, 수달 가죽 등을 밀수출하였다. 이 중강 개시는 두 나라 무역 상인에게 상당한 이익을 주었는데, 이때 참여한 조선 상인은 서울의 경상,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정도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중국과 무역해 재부를 축적해 왔던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또 다른 치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중강 개시는 밀무역 활동과 국가 기밀 누설 등을 이유로 여러 차례 혁파가 논의되었고, 광해군 때 후금이 성장하면서 사실상 중단되었다.

중강 개시는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된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조선은 1646년(인조 24) 전례에 따라 연 2회 개시를 열기로 하였다. 청나라가 압록강 북쪽 야인들의 생활을 위한 방편으로 중강에서 무역 시장을 열도록 압력을 행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중강 개시를 위해 의주부는 개성부와 황해·평안 감영에 소, 소금, 종이 등의 물자를 나누어 배정하였다. 그리고 별장(別將)을 따로 뽑아 압록강변에 물건을 모아 두고 기다렸다가 개시일 에 상인을 거느리고 중강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봉황성의 통관(通官) 장경(章京)과 더불어 값을 정하고 서로 교역하게 하였다.

조선의 수출품은 소, 다시마, 해삼, 면포, 포, 백지, 장지, 보습, 사기 등이었는데, 정해지지 않은 물품은 교역할 수 없었다. 이 가운데 소, 다시마, 해삼은 전체 교역액의 약 78%를 차지하는 주요 수출품이었다. 조선 수출품의 대가는 모두 소청포(小靑布)로 값을 계산하여 받았는데, 소청포 한 필을 은 3전 5푼 가치로 계산하였다. 소청포는 품질이 떨어지고 짧고 좁아서 쓸모가 거의 없으므로 중강 개시는 조선 측으로서는 부담스러운 교역이었다.

반면 청나라는 규정된 물품 외에 남초(南草) 등을 요구하고, 비단·털모자·면화를 가지고 와서 무역하려고 하였다. 북경 상인도 중강 무역에 참여하려 하였다.87)『인조실록』 권48, 인조 25년 3월 계묘 ; 『영조실록』 권43, 영조 13년 1월 병진. 그러나 조선 측은 개시에 참여하는 상인과 물품을 제한하려 했으며, 중국 북경 상인의 참여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밀무역 금지와 규정 준수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중강 개시를 기회로 이익을 누리려는 상인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상인이 국법을 어기고 함부로 따라가 마음대로 교역하는 중강 후시(中江後市)가 생겨난 것이다.

중강 후시는 개시와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중강 개시에서 필요한 면포, 마포, 소금, 우마, 농구 등의 물품 조달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상인이 맡고 있었으며, 서울 상인도 일부 참여하였다. 상인의 후시 활동에 대해 1729년(영조 5) 도승지 조명현은 “중강 개시에 상인들이 몰래 끼어 들어왔다. 이 길을 막아버리자 상인들은 단련사를 따라 들어가 심양에서 밀거래의 폐단을 일으켰다. 만약 심양에서의 밀거래가 끊긴다면 이들이 중강 개시로 몰려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이다.”88)『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86, 영조 5년 8월 초1일.라고 하였다. 17세기 후반 이래 중강 교역을 통한 무역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음을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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