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7. 만상의 무역 활동
  • 동지사행과 무역 상인
이철성

의주 상인 만상이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중국으로 가는 사행(使行) 일행에 참여하는 방법이었다. 사행 일원으로 중국의 수도인 연경(燕京)을 오가면서 자연스레 국제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무역이 본격적으로 조선 경제에 영향을 미친 때는 17세기 중반부터였다. 이 시기 청나라로 가는 사행을 ‘연행사(燕行使)’라고 하였다. 이는 명나라로 가는 사행을 ‘조천행(朝天行)’이라고 불러 사대(事大)의 뜻을 드러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표현이었다. ‘연행(燕行)’이라 함은 그저 청의 수도 연경으로 간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반목숨을 건다고 할 정도로 힘든 길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사대부에게 연행은 ‘남아로 태어나 넓은 천하(天下)를 보는 쾌사(快事)’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상인에게는 일확천금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였다.

연행사는 파견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그에 따라 사행의 구성과 규모도 달랐다. 조선 사행은 정기 사행과 비정기 사행으로 구분되었다. 정기 사행은 동지행(冬至行)과 역행(曆行)이 있었다. 동지행은 음 력설에 맞추어 연경에 도착하였는데, 음력 10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다음해 4월쯤 귀국하였다. 역행은 중국의 책력(冊曆)을 받아오는 사행이었다. 음력 8월에 출국하여 10월에 연경에 도착해 청나라의 시헌력(時憲曆)을 받아왔다. 비정기 사행으로는 청의 정책이나 외교적 처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한 사은행(謝恩行), 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다는 연락이 왔을 때 보내는 진위행(陳慰行)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사행의 목적과 구성, 규모 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동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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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燕行圖)
연행도(燕行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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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행은 삼사신(三使臣), 곧 정사·부사·서장관을 갖춘 사행이었다. 사행의 실무를 총괄하는 총책임자 수역(首譯)을 비롯한 공식 인원은 모두 35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삼사신이 데려갈 수 있는 자제군관(子弟軍官)부터 말을 끌고 짐을 운반해 갈 마부와 하인까지 합치면 총인원은 200∼300명 선에 달하였다. 자연히 무역을 하려는 상인들이 중국으로 대거 몰려갈 수 있었던 기회도 동지행이었다.

동지행이 연경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우선 추운 겨울인 음력 11월부터 12월까지 약 1개월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 지대와 풍속이 다른 요동 지방을 거쳐 가야 하였다. 동지행은 이 기간에 추위로 일정을 변경하기도 하였고, 병으로 몸져눕거나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 길을 무역 상단이 개별적으로 갈 수는 없었다. 상단이 개별적으로 압록강을 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량한 벌판에서 마적떼를 만날 우려도 있었다. 층층이 겹쳐 있는 청나라의 관문을 무사히 거쳐 오가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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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연정도도(入燕程途圖)
입연정도도(入燕程途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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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는 무역 상인은 그래서 사행 일원으로 들어가 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경상 같은 한양의 거상은 미리 역관(譯官)과 연결되어 그들의 무역 자금과 짐을 사행편에 부쳤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이 적은 상인은 마부 자리라도 얻으려 힘겨운 노력을 벌였다. 동지행은 음력 10월 중순경 서울을 떠나 7일 정도 여행 끝에 평양부에 들어왔다. 연경으로 갈 마부 선발은 평양에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상인들 가운데는 마부 자리를 얻기 위해 이미 음력 9월과 10월 무렵 서울로 올라와서는, 미리 손이 닿는 역관에게 청탁을 넣어 두기도 하였다.

평양에서의 마부 선발은 역관의 우두머리인 수역의 책임 아래에 이루어졌다. 마부에 지원한 상인은 마치 과거 시험의 합격 방이 붙는 것처럼 초조해했으며, 선발 여부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진풍경을 낳았다.89)『연원직지(燕轅直指)』 1권, 출강록(出彊錄), 11월 1일. 마부 자리도 여러 가지였다. 사행에 동원된 역마(驛馬)를 책임지는 마두(馬頭)가 있는가 하면, 역마를 끄는 역졸(驛卒)도 있었고, 쇄마(刷馬)를 끄는 쇄마구인(刷馬驅人)도 있었다. 농마두(籠馬頭)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우두머리였다. 사행의 정식 관원에게 허용된 사지마(私持馬)도 마찬가지 성격이었다.

마부 자리를 노린 사람이 모두 상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천주교 밀사(密使)로 동지사행에 끼어 들어간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1789년(정조 13) 동지사행에 끼어 중국으로 들어간 윤유일(尹有一)은 사지마의 자리를 은화 20냥에 사서 장사치 차림을 하고 연경으로 갔다. 또한 1789년과 1799년 황심(黃沁)은 동지사행의 쇄마구인 자리를 얻어 갔고, 김유산(金有山)도 금정역 역졸과 마부 자리를 얻어 연경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당시 사행을 수행하는 각종 명목의 자리는 돈으로 거래되었고, 무역 이익을 노리는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이러한 상인 가운데는 전 재산을 털고 일가친척의 돈까지 끌어 모아 이익을 보려는 소상(小商)이 많았을 것이다. 추운 겨울 한철 고생을 무릅쓰면 2∼3년을 먹고 지낼 수 있는 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거상의 조종을 받는 무역 행상으로 중국 물건을 사다가 그것을 국내 물주(物主)에게 넘기는 경제 네트워크에 편입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곧 사행의 공식 수행원으로서 중국 무역의 한 축을 이루었던 역관과 조선의 대표적인 무역 상인 경상·송상·유상·만상이었다.

역관은 마부·하인 등의 사행 인원을 선발하고 통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실무 책임자였다. 사행 무역에서 역관이 차지하는 권한은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관은 조선 정부에게 공식적인 보수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1653년(효종 4)부터 팔포제(八包制), 즉 인삼 80근을 무역 자금으로 가져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는 은화 2,000냥 정도의 규모였다. 당시 쌀 한 석이 은화 한 냥 정도였으니 쌀 2,000석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역관은 이 자금으로 무역을 하고 이익을 남겨 사행 경비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역관은 팔포 이외에 각급 아문(衙門)의 공식 무역도 맡았는데, 이를 별포(別包)라고 불렀다. 팔포 이외의 무역 자금이란 뜻이다. 그런데 만약 팔포와 별포의 비용을 자신이 채울 수 없는 역관은 자연스레 자금력이 풍부한 거상과 연결되었다. 서울의 경상은 지리적으로 역관과 훌륭한 협력자가 될 수 있었다. 한양의 구매력을 바탕으로 시전을 통해 수입품을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상 중에서 비단을 취급하던 입전(立廛), 백목(白木)과 더 불어 은을 취급하던 백목전 그리고 중국의 수입물을 팔던 청포전 상인 등이 경상으로서 무역 상인의 범주에 들었다고 보인다.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는 무역 별장이 역관과 더불어 각 아문의 공식 무역권인 별포를 소지하고 중국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 1727년(영조 3) 별포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의주부가 여섯 자리, 평안 감영과 개성부가 두 자리씩이었다. 여기에 평양 병영과 황해 감영이 한 자리씩을 가져 모두 열두 자리였다.

무역 별장에는 그 지역 상인이 뽑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만상이 평양·개성에 비해 세 배 이상의 별포 무역을 수행할 수 있었던 셈이다. 『임원경제지』에서 “일본·중국과 무역하여 거부가 된 자가 관서의 의주·안주·평양에 많다.”고 한 것은 별포 무역의 권리만 놓고 볼 때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의주부는 연행에 필요한 각종 부담을 분담하였고, 그 부담은 결국 상인층에서 나왔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만상은 무역의 이익을 보장받았다. 권력과 상인의 절묘한 결합인 것이다.

17세기 중엽 이후 약 100년 동안은 조선의 중개 무역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이때 조선 상인이 중국에서 수입한 대표적 물품은 비단실과 비단이었다. 이중 비단실의 대부분은 왜관 개시(倭館開市)를 통해 다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670년(현종 11) 민정중(閔鼎重)은 이런 무역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청나라에서 무역해 오는 비단실은 모두 왜관으로 들어갑니다.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실 100근을 60금(金)에 무역해 와서 왜관에 팔면 값이 160금이 됩니다. 이런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비단실은 수만 근이 있더라도 모두 팔 수 있습니다.”90)『현종개수실록』 권22, 현종 11년 3월 경신. 비단실 중개 무역에 참여한 상인은 2.7배에 달하는 이익을 남겼다. 그리고 이 중개 무역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침체에 빠진 조선의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한몫을 담당하고 있었다.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무역 상인 만상의 존재가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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