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7. 만상의 무역 활동
  • 만상의 책문·심양 무역
이철성

동지사행의 무역은 압록강을 넘어 연경을 오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난 곳은 책문·심양·연경에서였다. 만상은 연경 무역에도 참여했으나, 책문 무역과 심양 무역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다. 사행이 의주에 들어서면 만상들의 무역 준비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평양을 떠난 사행 일행이 의주에 도착하는 데에는 닷새 정도 걸렸다. 사행은 이곳에서 청나라의 조정에 낼 외교 문서와 방물 세폐(歲幣)를 점검하였다. 동시에 밀수 상인을 막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밀수 상인을 막아야 역관의 팔포 무역과 공식 무역의 이익이 보장되었다. 그리고 이 무역이 이익을 남겨야 조선 정부가 주지 못한 역관의 월급과 외교 경비 일부를 부담시킬 수 있었다. 서장관(書狀官)의 서명이 찍힌 목패(木牌)를 만들어 나누어 준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다. 이 목패는 나뭇조각 위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서장관의 서명을 새긴 일종의 신분증이었다. 목패는 도강하기 며칠 전 서장관의 이름으로 발급되었는데, 돌아올 때까지 내내 지니고 있어야 했다. 목패가 없이 압록강을 넘으면 이는 곧 무단으로 국경을 넘는 범월(犯越)이요 밀수 상인이었다.

수출 금지품과 무역 허용량 이상을 가지고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만상에게는 다시마, 해삼, 소가죽, 산짐승가죽, 종이, 담배, 무명 등의 잡물 교역이 허용되었는데 이를 잡복(雜卜)이라고 하였다. 만상의 잡복 검사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의주 부윤의 집무처 진번헌(眞蕃軒)에서 이루어졌다. 잡복 검사는 물종과 무게에 대한 것이었다. 검사장에는 서장관의 부하인 비장(裨將)과 역관이 의주 부윤의 비장과 자리를 함께 하였고, 검사는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이때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게를 늘리려는 쪽과 가볍게 달려는 쪽의 승강이가 벌어졌다. 만상과 같이 연행길에 오를 서장관의 비장과 역관은 물건을 더 많이 가져가려고 무게를 가볍게 달려고 하였다. 반면 의주 부윤의 비장은 규정량을 준수하고, 잡복의 양에 따라 세금을 거두었으므로 무게를 더 나가게 달려고 하였다. 이 잡복 검사는 3일 동안 해야 할 만큼 양이 많았는데, 만상의 짐이 넓은 뜰에 산더미처럼 쌓여 보기에 끔찍할 정도였다.91)『무오연행록』 권1, 무오년 11월 13∼15일.

압록강을 넘어가는 날에도 밀수 상인과 수출 금지품 반출을 적발하기 위한 검사가 실시되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인마를 점검할 때 사람은 그의 성명·거주지·나이 및 수염·흉터의 유무와 신장을 적고, 말은 털의 색깔을 기록한다. 세 단계로 기를 세워 문을 만들고 수출 금지 물건을 수색하는데, 큰 물품으로는 황금, 진주, 인삼, 수달가죽 및 팔포나 별포 이외에 지닌 은화 같은 것이며, 작은 물품으로는 물품의 가짓수가 수십 종에 달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하인 놈들은 저고리를 풀어 보고 바지도 만져 보며, 비장이나 역관들은 행장을 끌러 보이는데 옷 보따리, 이불 등이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 상자가 풀밭에 어지러이 뒹군다.”

그런데 세 단계로 나뉜 이 조사 과정에서 수출 금지 품목이 첫 번째 단계에서 들키면 곤장형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 걸리면 유배형이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발각되면 죄수의 목을 높이 매다는 효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황금·진주·인삼·수달가죽에서부터 수십 가지의 물건이 발각되었고, 규정량을 초과해 가져가려는 자도 있었다. 상인들이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고서 압록강을 넘어 무역에 나선 것은 역시 거기서 얻는 엄청난 이윤 때문이었다.

연경에 왕래하던 조선 사행은 대부분 육로를 이용하였다. 사행 육로는 청나라의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따라 몇 차례 바뀌었지만, 1679년(숙종 5) 이후에는 고정된 길을 이용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사행은 이 길을 따라 사흘 정도의 노숙 생활을 하면서 책문(柵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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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 노숙
봉황성 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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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사행의 정식 관원은 바닥에 온돌을 만들고, 겹무명으로 막을 친 군막(軍幕) 안에서 지냈다. 그러나 다른 수행 인원은 군막이 다닥다닥 붙은 바깥에서 나무로 불을 질러 놓고 밤을 지새야 하였다. 모닥불에서 나오는 화강이 밤을 훤하게 비추고 고함을 지르고 나팔을 불며 야경(夜警)을 도는 소리가 자못 흥을 돋우어 국경을 벗어난 느낌을 깨닫게 하였다.92)『부연일기』, 왕환일기(往還日記) , 무자년 5월.

책문은 청나라의 봉황성 소속으로 압록강에서 120리 떨어진 청나라 국경 관문이었다.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담장을 치고 문을 만들었으므로 중국에서는 이를 변문(邊門)이라 하였다. 하지만 책문은 단지 지붕에 띠를 덮은 문 한 칸이었고, 그 양 옆의 담장도 어깨를 넘지 않는 크기의 나무 막대기를 엉성하게 세워 사람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허술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의 출입국과 세관을 위한 공식 절차는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어떻든 책문 밖에 도착한 동지사 일행은 천막을 설치하고 인원과 말 그 리고 짐바리를 다시 점검하는 한편, 청나라 측에 책문으로 들어갈 것임을 알렸다. 다음날에는 입국을 위한 의례적 절차를 밟았다. 이를 “책문에 들어간다.”는 뜻에서 입책(入柵)이라 하였다. 반대로 사행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되돌아 나올 때도 같은 절차가 필요하였다. 이를 “책문을 나간다.”는 뜻에서 출책(出柵)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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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의 책문
『해동지도』의 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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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입책과 출책 과정에서 대규모 무역이 이루어졌다. 조선 사행이 오는 때가 되면, 중국 상인이 무역할 물건을 잔뜩 싣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책문으로 금주(金州)·복주(復州)·해주(海州)·개주(盖州) 지역의 면화, 심양(瀋陽)․산동(山東)의 면포, 중후소(中後所)·요동(遼東)의 모자 등을 실은 마차가 줄지어 왔고, 남방의 상선(商船)도 우가장의 해구를 통해 들어왔다. 북경 상인 또한 비단을 싣고 책문으로 왔다.

책문으로 모여든 중국 상인과 조선 상인 중에는 이미 꽤 친숙한 사람들이 있었다. 만상과 역관 중에는 앞다투어 중국 상인과 악수하며 은근하게 위로의 말을 나누기도 하였다. 중국 상인은 “서울에서 언제 뜨셨습니까? 집안도 다 편안하시며, 도중에 비를 만나지는 않으셨습니까? 가지신 은화는 충분하십니까?”라고 물었고, “어느 노야(老耶)께서는 오시지 않으며 어느 상공(相公)께서는 오시지 않으시냐?”고 친분이 있는 사람을 찾기도 하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때의 노야는 역관을 가리키는 것이고, 상공은 만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해마다 연경으로 무역하러 다녔으므로, 서로 친숙해져 모든 역관과 역마를 이끄는 마두(馬頭)가 안부를 주고받으며 얼굴에는 기쁜 기색을 띠었다.”93)『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6월 27일.고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안부와 근황을 묻고 담배도 나누어 줄 정도로 친했다.94)『무오연행록』 권1, 무오년 11월 21일. 책문 무역에서 만상의 활동은 그만큼 활발하였다.

책문 무역은 조선 정부의 공인 여부에 따라 개시와 후시로 구분되었다. 공인 이전의 책문 교역은 단련사제(團練使制), 연복제(延卜制), 여마제(餘馬制) 등을 이용해 이루어지는 불법 무역이었다. 그래서 후시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1707년(숙종 33) 책문 무역이 공인된 이후에는 후시라고 불리더라도, 수입 물품에 따른 세금을 의주부에 납부하기만 하면 되는 합법적인 국제 무역이었다.

책문 무역은 사행이 입책하는 시기와 출책하는 시기에 벌어졌다. 입책 때는 여마제가 교역의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여마는 ‘여분의 말’이라는 뜻이다. 사신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들어가는 중에 방물과 세폐를 실은 말이 쓰러질 것에 대비해, 열 꾸러미 정도의 짐을 실을 수 있는 말을 여분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1686년(숙종 12)에 남구만(南九萬)은 여마제의 폐단을 이렇게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여러 상인과 사행의 정식 관원까지 각각 물건을 갖추어 싣고 여마라고 핑계를 대고 압록강을 넘어갑니다. 그 수가 짐 1천여 꾸러미에 달합니다.”95)『비변사등록』 40, 숙종 12년 5월 4일. 의주부에서는 이 여마에 약간의 은화를 받고 그 수를 제한하지 않았고, 상인들은 이를 이용해 정부가 금지하는 물건을 숨겨 나갔다.

책문 무역은 사행이 연경에서 돌아와 출책하는 전후 시기에 더욱 성행하였다. 무역 상인은 이때 연복법(延卜法)을 이용하였다. 연복법은 사행이 연경에서 책문으로 되돌아 올 때, 의주부에서 사행 정식 관원의 짐을 싣고 귀국할 빈 말을 책문으로 보내는 제도이다. 그런데 책문까지 빈 말로 가지 않고 많은 은화를 싣고 가서 교역을 하고는 다시 의주로 돌아올 때는 사행 정식 관원의 짐이라고 핑계를 대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 사행 정식 관원의 짐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동지사행에는 여러 지역의 상인이 무역에 나섰으므로 여마와 연복을 만상이 독점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책문에서 가장 가까운 국경 도시 의주부가 이를 관장하였 으므로 자연 만상의 비중이 가장 컸다.

만상이 책문 무역에 참여해 이익을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단련사(團練使) 제도이다. 단련사 제도는 사행로 변화와 심양 세폐 분납과 관련이 있다. 즉, 1665년(현종 6)부터 조선 사행은 심양을 거쳐 연경으로 가도록 되었다. 이에 조선 사행은 심양에 들러 방물을 직접 분납하도록 하고 물건을 내려놓은 인마는 곧 귀환토록 하였다. 이때 중국과의 외교와 국방에 많은 부담을 지는 다섯 개 관청에게 무역 별장을 임명하고 심양 팔포(瀋陽八包)로 불리는 무역 권리를 인정하였다. 이것이 의주부․평안 감영·평안 병영·황해 감영·개성부에서 무역 별장제가 운영된 배경이었다.

단련사는 심양에서 귀환하는 인원과 말을 이끌고 돌아오는 임무를 맡은 관리였다. 이들에게도 심양 팔포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단련사는 심양 무역을 주관하면서 밀무역을 막는 임무를 띤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오히려 그들의 임무를 역이용하여 여러 날을 심양과 책문에 머물면서 마음껏 매매하고 그 짐을 그들의 말에 싣고 왔다. 이를 단련사 후시라고 했으나, 무역은 책문에서 더 성행했으므로, 성격상 책문 무역의 범주에 든다. 단련사를 이용한 교역이 많아지자, 의주부에서는 이 물건들을 실어오기 위한 연복마가 따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1727년(영조 3)에 헌납 김응복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전에는 심양과 책문에서 시장을 여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수 년 전부터 법령이 무너져 사행 때가 되면 상인들이 몰래 은화를 가지고 들어가 서로 매매해 놓았다가, 단련사의 돌아오는 인마를 이용하여 복물(卜物)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단련사가 세폐(歲幣)를 운반하는 말이 거의 수백 마리가 넘습니다. 처음에는 변장(邊將) 가운데 단련사를 뽑아 밀수 상인의 거래를 막고 감독하고 살펴 돌아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련사를 의주의 비장이 대신 맡아 도리어 상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수백 마리의 말로도 오히려 다 싣지 못하여 이들을 맞이할 짐 싣는 말을 책 문 밖에까지 더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연경의 물건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넘치게 되었습니다. 지금 서울이나 지방의 사람들은 쌀 한 섬 저축이 없이 살면서도 나설 때에는 비단으로 꾸미는 짓을 하여 사치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무역 별장의 열두 자리 가운데 의주 상인이 여섯 자리를 차지했고, 그들을 감독하는 단련사가 의주의 비장으로 바뀌었다. 만상이 무역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이에 중국의 물품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비단으로 치장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번성한 책문 무역의 거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사행 정식 관원과 단련사 일행의 팔포은을 제외하고도 매번 책문으로 흘러간 은화만도 10만여 냥이라는 기록이 있다. 책문 무역은 한 해 평균 네댓 차례씩 열렸다. 따라서 무역 규모가 40∼50만 냥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행 정식 관원의 팔포은까지 합한다면 연간 총 50∼60만 냥이 거래되는 셈이다. 이는 쌀 50만 석에 가까운 엄청난 규모였다. 무역 상인들이 책문에서 전개한 적극적인 무역 활동이 결국은 1707년(숙종 33) 책문 후시의 공인을 이끌어 내게 된다.

책문 무역은 이후 1725년(영조 1)에 역관들의 요청에 따라 다시 불법화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청나라와 일본이 직접 교역하면서 조선의 중개 무역이 크게 쇠퇴하였고, 그에 따라 일본에서 들어오던 은화도 감소하였다. 일본 은화의 유입이 격감되자 조선 정부의 은화 보유량도 줄어들었다. 자연히 역관은 각급 관청에서부터 무역 자금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더하여 만상이 주도하는 책문 후시가 성행하자 중국 물품의 국내 판매 주도권도 만상과 송상에게 빼앗겨 가고 있었다. 이것이 역관들이 조선 정부에 책문 무역을 금지해 주도록 요청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책문 무역이 불법화되자 평안도 일대는 밀수 상인의 소굴로 변화하였다. 1734년(영조 10)에 이조 참의 이종성은 “평안도는 우리나라의 밀수 상인이 기회만 있으면 무역을 하려고 밤낮으로 이익을 엿보는 무리와 팔 곳을 찾는 상인이 떼를 지어 있다.”96)『영조실록』 권39, 영조 10년 12월 계축.고 하였다. 책문 무역은 불법화되었지만 평안도와 황해도에는 은화와 명주와 중국 물건이 넘쳐났다. 조선 정부는 어쩔 수 없이 1754년(영조 30) 책문 무역을 다시 인정하고 세금을 거두어 공식화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이때 다시 공인된 책문 무역은 만상에게만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이에 이를 ‘만상 후시(灣商後市)’라고 불렀고, 이들에게 허용된 무역량을 ‘만포(灣包)’라고 하였다. 만상이 가지고 가는 팔포(八包)라는 의미에서였다.

만상이 국내의 모든 수출 물화를 매집하여 무역으로 연계시킬 수는 물론 없었다. 국내 상업을 장악하고 있던 경상과 사행 무역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관 그리고 전국에 송방을 지닌 송상과 연대가 불가피하였다. 그런데 만상은 주로 송상과 중국 무역의 이익을 나누면서 조선 상업계의 한 축을 차지하였다. 송상은 불법을 감수하고 국경을 넘어 밀무역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밀수 상인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수출이 허가된 가죽, 종이, 명주, 모시, 무명 등의 국내 상품을 만상에게 판매하고 동시에 만상이 수입한 중국 물화를 사서 국내에 팔았다.

예를 들어 소가죽은 18세기 후반부터 청나라와 일본에 대량으로 수출하던 상품이었다. 이 때문에 비합법적인 도살 행위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송상은 현방(懸房)이나 창전시민(昌廛市民)들을 따돌리고 이들 소가죽을 매점하여 만상에게 판매하였다. 구피계(狗皮契) 공인들만이 독점 납품하던 수달가죽도 송상이 사냥꾼에게 선금을 지불하고 매점하여 만상에게 팔았다. 방물지(方物紙)·별장지(別壯紙)·설화지(雪花紙) 등의 종이류는 원래 지계공인(紙契貢人)과 지전시인(紙廛市人)들이 독점 수매하던 물품이었다. 그런데 송상은 종이를 만들던 사찰의 승려들과 짜고 미리 사서 만상에게 전매하였다.97)『비변사등록』 172, 정조 12년 1월 8일. 송상은 모시 생산으로 유명하던 일곱 고을의 저포(苧布)도 서울의 저포전 시인(市人)을 따돌리고 사갔으며 포목 또한 매점 매석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역관의 무역이 심각한 곤란에 빠졌다. 사행을 통해 청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 정부로서는 역관들을 도울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하였다. 역관은 외교 실무를 담당한 관리였고, 외교 비용의 일부까지 부담하였기 때문이다. 1758년(영조 34)에 실시된 모자 무역과 1797년(정조 21)에 실시된 홍삼 무역의 첫 번째 목적도 역관 무역에 활로를 열어 주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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