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7. 만상의 무역 활동
  • 만상의 연경 홍삼 무역
이철성

인삼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귀재(貴材)’로 불려온 신비의 약용 특산물이었다. ‘신초(神艸)’ 또는 ‘지정(地精)’으로 불려온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오이씨에서 오이 나오고 콩에서 콩 나오게 마련이지만 인삼은 아니었다. 인삼은 여러 곳에서 생산되었다. 전칠삼(田七蔘)은 중국의 운남성과 광서성 일대에서 생산되는 인삼이고, 화기삼(花旗蔘)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나는 인삼이며, 죽절삼(竹節蔘)은 일본 인삼이다. 이들과 조선 인삼은 서로 다르다. 조선 인삼은 고려 인삼으로 불렸다. 고려 인삼이 다른 것과 구분되는 이유는 역시 효능 때문이다. 현대 과학은 인삼의 약효가 사포닌(Saponin)이란 성분에서 기인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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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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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닌이란 스페인어로 ‘거품’을 뜻한다. 물과 알코올에 잘 녹고, 저을 때 생겨난 거품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성질이 있는데, 해독 작용과 혈소판 응집 억제 작용 등 다양한 효과를 내는 화합물을 통틀어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 동북 3성 일대에서 생산되는 인삼에서 이 사포닌 성분이 가장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값도 전칠삼의 열 배, 화기삼의 두서너 배는 더 많이 받는다.

옛날부터 장백산맥(長白山脈)과 태백산맥(太白山脈)은 다른 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신비의 영약 ‘산삼(山蔘)’이 생산된다고 알려진 지역이다. 그래서 산삼의 고유명사 ‘심’, 그것을 채취하는 사람 ‘심마니’는 우리에게 낮선 용어가 아니다.

산삼은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산출되었다. 『임원경제지』에서는 영남과 호남에서 나는 것은 나삼(羅蔘), 관서·강원·강계 등에서 나는 것은 강삼(江蔘), 관북에서 나는 것은 북삼(北蔘)이라고 하였다. 인삼의 품질로는 나삼을 최고로 치고 영동·강계·함경 지역 인삼을 그다음으로 쳤다. 그러나 산삼의 산출량은 심마니의 천운(天運)에 전적으로 기대야 하였다. 자연히 사회적 수요에는 그 양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에 산양삼(山養蔘), 즉 산에 종자를 심어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캐내는 인삼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산양삼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삼과 재배삼의 중간 범주에 든다. 하지만 그 산출량에도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연삼은 약효의 우수성 때문에 고대에서부터 상인에게 넘겨져 해외로 수출되었다. 그렇지만 인삼이 본격적인 무역 상품으로써 경제적 비중과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였다. 그리고 17세기 중 엽부터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무역 상품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조선의 의학서가 알려졌다. 이에 따라 조선 인삼의 효능에 대한 인식도 한층 높아졌다. 자연히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상황을 적은 한 자료에서는 “일본의 풍속에는 어떤 병이든 인삼을 쓰게 되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값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다투어 매입하려는 까닭에 서울에서 70냥이면 사는 인삼이 일본의 에도(江戶)로 들어가면 300여 냥 정도에 팔린다.”고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지은 이익(李瀷)도 “일본인의 풍속에 병이 생기면 반드시 인삼을 쓰니, 만약 무역을 막으면 죽을 각오로 다투어 사단이 일어날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교역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조선 인삼에 대하여 일본 사회가 얼마나 열망하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당시 일본에서는 나이 어린 여인들이 조선 인삼을 사서 제 아버지의 난치병을 고치기 위해 유곽(遊廓)에서 몸을 팔았다는 이야기가 만담이나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인삼을 닮은 풀뿌리를 찾는 무리가 줄을 이어 가짜 인삼이 20∼30종류나 나돌았는데, 약이 되기는커녕 생명에 위험이 되는 독초까지도 있어 큰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일본에서는 조선 인삼을 사들여 오기 위해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는 순도 80%의 특주은(特鑄銀)을 만들었다. 조선 상인이 순도가 낮은 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내에서 통용되는 은화의 순도가 30% 내외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조선 인삼을 수입하려는 일본 사람의 각별한 노력을 잘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은 은을 교토에서 인삼대왕고은으로 주조한 후 대마도를 거쳐 왜관으로 가져와 조선 인삼과 중국 물건을 교환하였다. 이렇게 일본에서 들어온 특주은, 즉 왜은(倭銀)의 양은 한 해 11만 톤에 이르기도 하였다. 18세기 중반까지 왜은이 수입되고 중개 무역이 최고조에 이르는 데 일등 공신은 인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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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인삼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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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삼의 산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삼이 점차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인삼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지만 상인 놈들이 연경과 동래로 옮겨 팔기 때문에 자연히 국내에서는 희귀하게 되었다”, “강계에서 캐낸 인삼은 모두 상인의 손에 들어가 연경으로 팔려나간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인삼 가운데 10분의 8이나 9는 일본으로 넘어간다.”고들 하였다.

인삼의 대량 채취와 수출이 계속되면서 국내의 인삼 품귀 현상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인삼의 판매 이익을 노린 상인들이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인삼을 매점 매석한 뒤에,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인삼 10근을 20근으로 만들고 100근을 200근으로 만들어 왜관으로 팔아넘기는 ‘위조 인삼 제조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세기에는 나라 안에서 약용으로 쓸 인삼도 얻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자연 조선 사회는 인삼 채취 단계에서 인삼 재배 단계로의 진입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삼 종자를 밭에 심어 재배하는 가삼(家蔘)이 출현하였다.

그렇지만 가삼이 과연 언제, 어느 지역에서, 누구에 의해 생산 단계로 접어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단지 인삼 재배는 늦어도 18세기 초반에는 시작되어 18세기 중반 이후 전국적으로 진행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강계 지방에도 삼포(蔘圃)가 권장될 정도로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경지(中京誌)』에는 “숙종(1675∼1720) 때 현재의 화순 지역인 전라도 동복현의 한 여인이 산삼의 씨를 받아 이를 밭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고도 하고 “성공한 인삼 재배 기술을 배워 전파시킨 사람은 최 아무개인데, 그는 개성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10년대에 인삼 재배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18세기 후반에는 “인삼 재배가 성행한 후 경상도·강원도에서 서울의 내의원으로 상납되는 인삼은 대부분 가삼이다.”라고 하거나 “영남은 예로부터 산삼(山蔘)이 나오는 지방이라고 했으나 근래 산삼이 점점 귀해짐에 따라 집집마다 인삼을 재배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인삼 재배가 성행하였다.

가삼 재배가 성행하자 그에 대한 가공 기술도 발전해 갔다. 4∼5년 된 가삼을 밭에서 뽑은 것을 생삼(生蔘) 또는 수삼(水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생삼은 수분을 포함하고 있어 오래 보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생삼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자연 건조시켰는데, 이를 백삼(白蔘) 또는 건삼(乾蔘)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건삼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 부서지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자연삼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였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일찍이 크고 작은 인삼을 혼합하여 끓여 말리는 방법을 썼고, 이를 파삼(把蔘)이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양각삼(洋角蔘)이라 하여 몸체는 작으나 색깔이 희고 품질이 좋은 자연삼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삼을 선호하였다.

인삼을 끓여 가공하는 방법은 17세기 이전부터 알려졌지만, 인삼 재배가 시작되면서 생삼 건조는 끓여 말리는 방식에서 쪄서 말리는 증조(蒸造) 방식으로 바뀌었다. 즉 빈 공간에 시렁을 만들어 그 위에 생삼을 얹은 다음 시렁 밑에서 숯불을 피워 말렸는데, 이를 홍삼(紅蔘)이라 하였다. 그리고 홍삼을 만드는 장소를 증포소(蒸包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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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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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가삼의 매매가 널리 행해지고, 중국에서 백삼보다 홍삼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자, 무역 상인들은 홍삼 밀무역을 전개해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이 홍삼 무역의 이익에 주목한 왕이 정조(正祖)이다. 정조는 홍삼 밀무역을 합법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재정을 확충하려는 목적에서 홍삼 무역을 합법화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홍삼 무역이 공인되기 몇 개월 전 화성부 건설과 도시 발전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려 한 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1797년(정조 21) 2월에 정조는 「화성부내신접부실호삼모이획절목(華城 府內新接富實戶蔘帽已劃節目)」을 반포한다. 화성부로 새로 이사 오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모자와 가삼의 전매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정조의 화성 건설과 행차는 당대 최대의 관심거리이자 이벤트였다. 화성의 웅장함과 정조 행차의 화려함에서 이를 뒷받침할 인원과 물자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모자와 가삼의 전매권이 한양에 버금가는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의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조가 내건 대표적 특권이었다.

정조의 이러한 시도는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의 강한 반대로 좌절되었다.102)『비변사등록』 185, 정조 21년 2월 22일. 그러나 사행 팔포에 은화와 함께 홍삼을 채워갈 수 있도록 하는 사항만은 그대로 인정하여 시행되었다. 홍삼은 포기할 수 없는 재화의 샘물이었다. 이에 홍삼 무역을 공식화한 포삼제(包蔘制)가 1797년(정조 21)에 실시되었다. 포삼이라 부른 것은 팔포에 채우는 인삼이란 의미에서였다.

포삼제 실시와 함께 홍삼 무역권과 국내 가삼 전매권을 맡았던 사람은 역관과 경상이었다. 중국에서의 높은 홍삼 수요를 잘 알고 있던 역관들이 주도하여 홍삼 제조장인 증포소(蒸包所)가 한강변에 설치되었다. 역관과 경상 주도의 포삼계(包蔘契)도 구성되어 홍삼 제조와 무역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책문 무역에 참여하고 있던 만상도 홍삼 무역에 자연스럽게 관여하였다. 또한 만상 군관에게도 포삼 무역권이 주어졌다. 만상 군관은 사행에 필요한 말에게 먹일 말꼴을 담당하는 방요군관(放料軍官)과 사행이 압록강을 건너면 하루 앞서 잠자리와 음식 등을 미리 준비하는 하처군관(下處軍官)이 있었다. 이들은 사행뿐만 아니라 개시가 있을 때도 힘겨운 국역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보상 차원에서 홍삼 무역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포삼제 실시와 함께 만상이 홍삼 무역의 주도권을 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만상은 18세기부터 인삼 재배와 홍삼 제조업에 자본을 투입하여 삼포(蔘圃)를 경영하고, 홍삼을 제조하기 시작한 개성 상인과 함께 밀무역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개성 유수를 움직여 1810년(순조 10) 경강의 증포소를 혁파하여 이를 개성으로 옮기고, 포삼의 전매권을 확보하기 시 작하였다.

홍삼 무역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포삼제 실시 당시 홍삼 수출량은 120근이었다. 그런데 불과 50여 년 만에 수출량은 4만 근까지 증가하였다. 1851년(철종 2) 홍삼 무역에 대한 기록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포삼제 창설은 오로지 역관의 생업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 변하여 의주 상인의 무역 밑천이 되었으며, 두 번 변하여 개성 사람들이 생업으로 삼는 직업이 되었으며, 세 번 변하여 세액이 증가함에 따라 재정을 보충하는 큰 나랏일이 되었습니다.” 즉, 홍삼 무역은 애초에 역관의 생계를 돕는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후 홍삼은 의주 상인의 무역 상품이 되었고, 개성 상인은 홍삼을 만들어 파는 생산자가 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홍삼이 국가 재정 보충의 확실한 방법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이 그러하였다. 19세기 후반 홍삼 무역에서 만상은 포삼 별장이었고, 송상은 포삼 포주였다. 포삼 별장은 만상 가운데 선별된 상인이었는데, 그 숫자는 시기에 따라 19명에서 40명까지 약간씩 달랐다. 이들은 홍삼을 생산하는 포주를 지정하고 홍삼을 생산하여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 포삼세를 납부하는 책임도 이들의 임무였다. 그만큼 많은 이권이 걸려 있었다.

이에 경상들도 별장에 뽑히려고 갖은 술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포삼 포주는 홍삼 제조 능력을 갖춘 자였다. 포삼 별장 두 사람이 개성에 하나의 증포소를 결정하여 그들이 가지고 갈 홍삼 제조를 주문하면 포삼 포주가 홍삼을 제조하였다. 별장과 포주는 서로 연결되어 규정량 이상의 홍삼을 몰래 만들어 밀무역을 시도할 수도 있었다. 반면 조선 정부는 홍삼 무역에서 약 20만 냥의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포삼세는 “소소한 세금이 들어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며, 부족한 경비를 보충하는 데 더없이 좋은 방편”이었다.

청나라와의 홍삼 무역이 확장된 데에는 홍삼의 품질과 효능이 좋았던 데다가, 아편 해독에 특효가 있다는 소문도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만상이 무역 상인으로 큰돈을 번 것은 중국 상인보다 뛰어난 협상 전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나라 상인들은 홍삼의 구입 단가를 낮추어야 이익이 남았고 만상은 높은 가격으로 팔아야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만상에게 가장 큰 약점은 사행과 함께 귀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청나라 상인은 이를 최대한 이용하려 했고, 만상은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했다.

조선의 정부 공식 기록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 상인과 청나라 상인의 긴박한 대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요즈음 중국 상인들은 이전에 무역했던 홍삼을 내놓고 보여 주면서 ‘이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저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험합니다. 결국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끝에 가서야 어쩔 수 없이 교역하게 됩니다. 이에 마침내 무역하기는 하나 온갖 이유로 싼 가격에 하게 됩니다. 교묘하게 속이는 청나라의 인심이 이와 같습니다.”103)『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순조 2년 4월 초10일. 만상으로 잘 알려진 거상 임상옥의 활약상을 정사(正史)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임상옥이 가격을 담합한 청나라 상인들과 맞서 헐값으로 홍삼을 넘길 수 없다고 버티다가, 사행이 회동관을 떠나는 날 인삼을 마당에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오히려 비싼 가격에 홍삼을 팔아넘겨 청나라 상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탄생한다.

역관들에게도 인삼 무역권이 있었다. 연경의 홍삼 무역 광경을 알려 주는 『무오연행록』의 다른 기록을 보자. “연전에 홍삼 값이 매 근 300냥이었고, 가을 역행에 600냥이 되었다. 이에 이번에도 값이 700냥에 이르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연경에 이르자 연경 무역을 주름잡는다던 신가·장가 두 상인이 서로 짜고 구매하지 않으면서 350냥에 팔라고 하였다. 역관들은 큰 손해를 볼 것이 뻔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104)『무오연행록』 권3, 무오년 12월 27일. 결국 이때 역관은 홍삼을 거의 이익이 남지 않는 350냥에 팔았다. 그런데 이번엔 중국 상인이 비단 값을 20냥씩 덧붙인 비싼 가격으로 담합하고 나왔다. 연경의 무역은 자칫하면 오히려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홍삼 무역이 성공하기 위해선 상인의 상업적 재주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홍삼 무역의 성패는 중국 무역의 성패와 직결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국내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학규(李學逵)의 시는 이런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나라 밖 홍삼이 천하에 알려져

능라 비단이 해마다 압록강을 건너오네

올해에는 인삼이 나쁘다고 장사꾼들이 끊어졌으니

목화나 새로 심어 짧은 치마나 지어야겠네.105)이학규, 『낙하생고(洛下生藁)』, 「회안종침시 오수(淮安種葠詩五首)」 5 ; 허경진, 「조선 후기 한문학에 나타난 상업 문화」, 『동방학지』 2003, 120쪽, 210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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