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3장 평양 상인과 의주 상인
  • 8. 만상, 의주의 퇴장과 신의주
이철성

조선이 낳은 거상의 고장 가운데 만상이 근거했던 의주만큼 역사적 흥망이 일시에 뒤바뀐 곳도 없을 것이다. 국경 도시이자 무역 도시 의주는 1882년 8월에 「조중 상민 수륙 무역 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역 장정 제5조에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둔 책문과 의주, 두만강을 사이에 둔 훈춘(琿春)과 회령(會寧)을 각각 ‘개시 지역’으로 하고 구체적인 시행 방법은 두 나라 관원이 현지를 실지 답사한 후에 결정한다고 하였다. 그 시행 방법으로 1883년 3월 의주에서 조인된 것이 「봉천과 조선 변민 교역 장정 24조(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二十四條)」, 곧 중강 통상 장정(中江通商章程)이었다.

그 제4조에서 조선과 청나라는 중강과 의주를 교역장으로 삼는 데 합의한다. 또한 중강과 의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상민(商民)의 무역은 아침에 와서 저녁에는 돌아가도록 하였다. 봉천성 변경에 조선 사람이 집을 짓거나 점포를 개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동시에 중국인도 조선에서 가옥을 짓거나 점포를 개설하지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세관은 중강 부근의 구련성(九連城) 앞과 의주 서성(西城) 밖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조중 무역 장정과 중강 통상 장정은 만상이 활동했던 책문 중강 개시보 다는 개방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었다. 의주-중강-책문 일대에 집이나 상가는 짓지 못하지만 자유로운 무역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의주의 무역은 개항 이후 침체 일로를 걸었다. 우선 청나라 상인은 국경보다는 조선 각 지역에서 원세개의 비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었다. 또한, 운송 수단으로 증기선이 등장하면서 상해·천진에서 인천으로 화물이 배편으로 운송되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육로를 통한 사행 무역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이에 만상 가운데에는 활동 지역을 인천으로 옮겨 무역업에 투신하는 자도 있었다.

만상 객주 홍종대(洪鍾大)가 그 좋은 예이다. 홍종대는 객주업을 하며 인천으로 내려와 미국 모오스 & 타운센드 상사로부터 1만 1,766원 7각 1분(1만 1,766달러 71센트)의 수입 상품을 외상으로 선대(先貸) 받았다. 이 시기 타운센드 상회에게 선대를 받아 장사에 나선 상인은 인천 지역뿐 아니라 수원, 개성, 성천(成川) 등의 객주도 있었다. 이들은 개항 이전 자본력을 지닌 상인이었으나, 외국 상인과의 선대를 제대로 갚지 못해 부채 소송에 휩싸이는 운명을 맞았다. 홍종대도 이 범주에 들었다. 홍종대는 1891년 평양 동전 주조 때 의주부의 자금을 대출받아 동전의 원료인 동(銅) 무역에 종사하여 거금을 치부하기도 하였다. 타운센드와는 쌀과 면화를 비롯한 조선 물품과 타운센드가 수입한 물품 교역을 수행했는데, 독일 세창 양행과 청나라 상인과도 거래하였다. 그러나 부채를 갚지 못해 타운센드, 세창 양행 등에게 소송을 당하여 체포되기에 이른다.106)하지연, 「타운센드 상회(Toensend & Co.) 연구」, 『한국 근대사 연구』 4, 1996.

중국과의 육로 무역이 해상 교통에 밀리고 조선의 무역 조건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의주와 만상의 상업 환경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만상의 무역 활동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조선 정부가 전쟁 이후 일본의 강요에 따라 조중 무역 장정과 중강 통상 장정 등 청나라와 맺어 온 일체의 조약 파기를 통고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의주-중강-책문의 교역장은 사실상 의미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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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통해 목재를 운송하는 뗏목
압록강을 통해 목재를 운송하는 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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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후 러시아의 세력 확장과 고종의 아관 파천은 압록강변 의주 땅의 운명에도 영향을 크게 미쳤다. 러시아는 1896년에 두만강,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을 차지한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 지역 삼림 벌채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1903년부터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는 봉황성에 주둔하던 러시아군 일부를 압록강 건너인 안동현(安東縣)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 중 한 소대는 옷을 갈아입고 강을 넘어 용천군까지 진출해 땅을 구입하고는 병참부로 사용할 창고와 사무소 건설 공사에 착수하였다. 또한 삼림 벌목을 백두산까지 확대시키고 외국인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이 사실에 접한 일본은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영국과 협력하여 조선 정부에 의주를 개시하도록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군사적 요충지 용암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조선 정부에 조차(租借) 계약안 작성을 요구하는 한편, 용암포 뒷산에 포대를 건설하고 외인(外人)의 출입을 불허하는 일이 벌어졌다. 석탄, 탄약 등 군수품을 실은 배들도 입항하였다. 또 러시아는 용암포에서 10리쯤 떨어진 압록강 입구의 돌출지 두류포에도 망루를 건설하는 등 군사 기지화 작업을 노골화하였다.

러시아가 용암포를 군사 기지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러일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5일에 군사 행동을 시작하고 그 날짜로 러시아에 국교 단절을 통고하였다. 이어 2월 10일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하 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에 앞서 1월 21일 국외 중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2월 9일 인천에 상륙한 후 그날로 서울에 진주하였다. 일본군은 인천, 남양, 원산, 군산 등지에 상륙하여 조선을 사실상 점령하고 압록강과 만주를 향해 북상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도 않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진출하였다. 러일 전쟁은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일본은 1904년 한일 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한 이후인 2월 25일 한국 정부에게 의주 개시를 선언하도록 하였고, 3월 23일에는 용암포 개항도 선언하게 된다. 의주도 개항지가 된 것이다.

의주의 운명을 바꾼 또 다른 원인은 경의선 철도의 부설이다. 한일 의정서가 체결된 이후 일본은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이 맡을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그런데 이 철도 부설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압록강 가교 지점의 선정이었다. 기존의 의주-중강-구련성으로 가는 지점과 의주에서 약 20㎞ 하류에 위치한 안동현 건너편이 검토의 대상이었다. 결론은 의주에 다리를 건설하면, 압록강의 지류가 사분오열하여 다리의 연장이 다른 지점보다 배가 넘게 되고, 또 강을 건넌 이후부터는 산악 지대가 계속되어 정거장을 설치할 수 없다는 보고가 나왔다. 이 보고에 따라 압록강 철교는 안동현의 건너편 지점으로 결정되었다. 이것이 신의주의 시작이다.

1906년 3월에 경의 철도가 완전 개통되자 의주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반면 신의주는 안동현과 이어지면서 새로운 국경 도시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국경 도시이자 무역 도시로 대도회를 이루었던 의주는 이후 압록강변과 백두산 지역의 벽지 고을로 통하는 토산물의 집산지로 간신히 면목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의 무역상으로 거상의 지위를 누렸던 만상도 번영과 영화를 뒤로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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