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2. 개성 상인의 활동과 정신
  • 개성 상인의 출현
  • 고려시대의 개성 상인
정성일

고려시대에 개성 상인은 수도 상인의 위치에 있으면서 이미 전국의 상권을 지배하고 있었다. 919년 개경을 수도로 삼으면서 상설 시장인 시전(市廛)이 설치되었다. 당시 개경은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황성(皇城)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뻗은 간선대로 좌우에 정부가 건설한 행랑(行廊)에 입주하여 영업을 하는 상인들이 많았다. 개국 초기 광화문에서 십자가에 이르는 곳에 1,008칸의 시전 행랑이 들어서 있었다. 고려 말기에는 그것이 최소한 1,200칸 이상으로 확대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시전 행랑 한 칸에서 영업하는 시전 상인을 2∼3명 정도로 잡는다면 고려 후기 개경의 시전 상인은 최소한 2,400∼3,6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된다.110)박평식, 「고려 후기 개경 상업」, 『국사관논총』 98, 2002, 216∼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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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전경(松都全景)
송도 전경(松都全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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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개경의 정주(定住) 인구가 상당한 규모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13세기 전반 개경의 호구 수가 이미 10만 호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개경의 주민 호수가 13만 호라 했고, 김육(金堉)이 쓴 『송도지(松都誌)』에는 10만 호로 되어 있다. 이 숫자를 그대로 믿는다면 호당 평균 인구를 다섯 명으로만 잡아도 개경의 인구가 50만 명에 이른다. 그렇지만 조선 초기 세종 때 한양의 호수가 성저(城底) 10리를 포함하여 대략 2만 1,000호였다는 점을 들어 이 숫자가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11)박평식, 「고려 후기 개경 상업」, 223쪽.

고려시대 개경의 정주 인구를 정확하게 밝혀줄 수 있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수십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수도인 개경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도성 인구의 집중은 정부의 소요 물자 증대를 가져왔다. 이에 힘입어 개경의 시전과 상업은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여기에 조공 무역·공무역·사무역·밀무역 등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지방 상업과 대외 무역이 연계되면서 고려 후기 교환 경제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교환의 이득(gains from trade)을 차지하기 위하여 왕실과 특권 세력이 상업에 개입하였다. 그와 함께 특권층과 연계된 대상인이 유통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국왕의 국내외 교역 활동을 대리 상인 형태로 주관한 자들이 모두 상인 출신이었다. 또 고려 후기에 오면 상인들 자신이 관직에 진출하여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국내외에 걸친 상업 활동을 확대시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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