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2. 개성 상인의 활동과 정신
  • 개성 상인의 상업 활동
  • 개성 상인의 독특한 경영 기법
정성일

개성 상인을 유명하게 만든 것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독특한 회계 방식인 송도 사개 치부법(松都四介置簿法)이다. 치부란 돈이나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장부에 적는다는 뜻이며, 사개(四介)란 그것을 네 가지로 분개(分介)함을 말한다. 원래 사개는 건축에서 쓰는 말로서 ‘네 모퉁이가 서로 물려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데, 그래서 사개 치부법은 네 가지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회계 작성법을 뜻하는 것이다. 즉, 개성 상인은 상품 거래와 현금 흐름을 채권(捧次秩)·채무(給次秩)·매입(買得秩)·매각(放入秩)의 네 개로 구분하여 장부에 기록해 두고 있었다.121)조병찬, 『한국 시장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4,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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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의 상인과 달리 개성 상인이 현대의 복식 부기와 비슷한 회계 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개성 특유의 문화적 전통의 영향 때문이었다. 개성 상인 가운데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소외당한 옛 왕조의 사대부 계층을 비롯하여 지식인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지식은 상업의 합 리적 경영과 상술을 개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미 서양의 베네치아 상인보다 2세기나 앞서서 사개 치부법이라는 독특한 복식 부기를 고안하여 사용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개성 상인은 수입·지출과 손익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일을 상업 사용인에게 일임하는 대신에, 상업 거래와 자본의 흐름을 정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바로 사개 치부법이다. 규모가 큰 상점을 일컫는 전(廛)을 비롯하여, 규모가 아주 작은 소매점을 뜻하는 가가(假家), 즉 길옆으로 내몰려서 임시로 설치한 점포에서도 사개 치부법을 사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매점업자인 도가(都賈)·객주(客主)들과 상인 길드 조직인 도중(都中) 그리고 고리대금업자, 인삼을 재배·판매하는 삼포업자(蔘圃業者) 등도 이 방식을 널리 사용하였다.122)홍희유, 「송도 사개 문서에 반영된 송상들의 도고(都賈) 활동」, 57∼58쪽.

개성 상인의 독특한 경영 기법 중 주목을 끄는 것은 그들의 상업 조직이다. 15세기 후반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등장하는 홍생(洪生)이라는 작중 인물은 상선(商船)을 이끌고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던 당시 개성 상인을 전형으로 한 가상의 인물이었다. 이처럼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개성 상인의 행상 활동은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15세기 후반 장시의 성립과 전국적인 확산이 그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행상단에 의한 대규모 상업 활동은 그에 걸맞은 상업 조직의 대두를 요구하고 있었다.123)홍희유, 「송도 사개 문서에 반영된 송상들의 도고 활동」, 51쪽 ; 박평식, 『조선 전기 상업사 연구』, 212∼213쪽.

상거래가 확대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상업 거래의 과정과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상업 자본, 즉 도가(都家·都賈)는 개인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처럼 방대한 업무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사용인 제도를 출현시킨 것이다. 이 제도는 개성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인데, 개성의 상인들은 사용인으로서 차인·서사·수사환·사환 등을 고용하였다.124)홍희유, 「송도 사개 문서에 반영된 송상들의 도고 활동」, 56∼57쪽 ; 朝鮮總督府, 『朝鮮人の商業』, 13쪽, 18쪽 ; 조병찬, 『한국 시장사』, 125∼126쪽.

차인(差人)을 가리켜 방아(房兒)라고도 불렀는데 영업 공간이던 점방에 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들은 주인의 대리자 또는 방조자로서 영업상 제기되는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고급 사용인이었다. 영업주의 신용을 얻어 차인으로 발탁된 사람은 주인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상업에 종사하거나 주인에게서 자본을 융통받아 독자적으로 지방 행상이나 금융업에 종사하였다. 다시 말해서 차인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인에게서 빌린 자본과 상품에 대하여 이자만 지불하고 행상에 대한 손익은 모두 차인에게 귀속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과 상품은 주인이 대주고 행상 판매는 차인이 한 뒤에 거기에서 발생한 이익을 주인과 차인이 반반씩 나누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 차인은 독립적 상인이라기보다는 주종 관계에 있는 사용인이었다. 요컨대 차인은 주인에게서 일정 금액의 월급을 받거나 자기 책임 아래 손익 계산을 하여 이익 분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영업에 종사하다가 정기적으로 귀환하여 자기 주인에게 사개 치부법에 따른 회계 보고를 하였다. 차인들에게는 주인의 결심 여하에 따라서 독립적인 상업 자본가로서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서사(書師)는 글자 그대로 서기(書記)처럼 문서 작성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즉, 사개 치부법에 따라 장부를 처리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전문가이다. 그들은 월급제 형태로 고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이익 분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요즘의 지배인에 해당하는 직책의 사람을 수사환(首使喚)이라고 하였다. 이들에게는 일정한 보수가 없었고 영업 실적에 따라 결산 때 이익의 일부를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이 6∼7년 동안 재직하다가 주인의 신용을 얻게 되면 주인은 소자본을 주어 독립해 지방 행상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다.

나이 어린 소년 점원을 가리켜 사환(使喚)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하급 사용인에 해당한다. 개성에서는 아무리 세력 있는 가문이라 하더라도 자기 아들에게 장사를 가르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점포인 상전(商廛)에 사환으로 맡겨 두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요즈음 말로 하면 수습사원에 해당하는데 주로 점방에서 상품 판매에 종사하면서 상업상 제기되는 여러 가지 잡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보수 규정이 따로 없었다. 신발·두루마기·갓·망건 등을 해마다 한두 차례 제공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원래 이 사람들은 주인에게 장사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고용된 것이지, 보수를 받으려고 고용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 가운데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에 따라 수사환이 될 수도 있었으며, 영업상의 능력과 주인에 대한 충성도가 인정되면 주인이 차인으로 발탁하거나 독립적인 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처럼 주인과 상업 사용인과의 관계는 중세의 도제(徒弟) 제도와 비슷하였다. 차인이나 사환들은 대부분 주인과 친인척 관계에 있거나 친구 관계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상업 사용인 제도의 출현과 발전은 개성 상인의 성장을 반영하는 중요한 증거인 셈이다.

개성 상인의 행상 활동은 거의 전국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 중요한 상업 중심지에는 그들의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상방(商房), 즉 사무소가 필요하였다. 방(房) 또는 실(室)이라 불리는 이곳은 물건을 만들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상점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입방(笠房)이라고 하면 갓을 만들어 파는 곳을 말하며, 옥을 가공하여 파는 곳을 옥방(玉房)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공방(工房)이라는 말과 함께 상방(商房)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개성 상인의 활동이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송상의 상방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되었고, 그것을 줄여서 송방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하여튼 개성 상인은 그곳을 통해서 각지의 생산물을 독점적으로 매입하여 판매하였다. 물론 이러한 매점 방식이 개성 상인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서울 상인인 경상은 물론 다른 지역의 상인들도 이윤 추구의 방법으로 매점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렇지만 개성 상인의 매점 능력은 다른 상인들에 비하여 탁월하였다.

예를 들면 1750년(영조 15)에는 개성 상인의 매점 행위 때문에 국내의 인삼 유통이 거의 마비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개성 상인의 행상 활동이 서울의 시전이나 공인(貢人)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준 예는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갓의 원료인 양태(凉臺)를 통해 살필 수 있다.

목마장으로 이름난 제주도의 갓이 육지로 팔려 나갈 때는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을 거쳐 서울의 양태전(凉臺廛)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강진과 해남은 갓의 중간 집산지였던 셈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개성 상인이 직접 그곳으로 가서 갓을 매점한 다음 다시 국내 곳곳에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한 것이다. 동해 연안에서 생산되는 수달가죽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공인들은 사냥꾼이나 중간 상인이 수달가죽을 서울까지 가져오기를 기다렸다가 매입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개성 상인은 직접 생산지로 달려가서 물건을 사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개성 상인은 필요한 경우 미리 값을 지불하는 이른바 선대제(先貸制, Putting-out System) 방법을 동원하여 물품을 매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 특권을 받은 관상(官商)인 공인들보다는 사상(私商)인 개성 상인이 상품 확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개성 상인이 행상 조직을 통하여 국내의 생산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서에 따르더라도 개성 상인이 장악한 생산 지역은 거의 전국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125)강만길, 『한국 상업의 역사』 제2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132∼136쪽 ; 홍희유, 「송도 사개 문서에 반영된 송상들의 도고 활동」, 59∼61쪽.

개성 상인은 전국 각지를 활동 무대로 하여 행상을 하였기 때문에 상품과 함께 거래 대금을 운반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였다. 그런데 동전을 이용하면 동전의 운반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다. 도적 등에게 강탈당할지도 모르는 위험까지 고려한다면 동전, 즉 화폐의 운반 비용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개성 상인이 고안해 낸 것이 곧 어음의 일종인 환(換)이라는 신 용 화폐이다. 예를 들면 물건을 거래하고 난 뒤에 그 대금을 서울에 가서 찾는 환을 가리켜 경환(京換)이라 불렀다. 개성 상인이 처음 쓰기 시작한 환 거래는 19세기에 오면 개성 지역에서 통용되는 송환(松換)을 비롯하여, 인천환(仁川換)·전주환(全州換)·선천환(宣川換)·철산환(鐵山換)·해주환(海州換) 등의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널리 통용되었다.126)홍희유, 「송도 사개 문서에 반영된 송상들의 도고 활동」,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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