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4. 동래 상인이 개성 상인과 다른 점
  • [동래 상인과 일본어 통역관의 경쟁]
  • 동래 상인과 일본어 통역관의 경쟁
정성일

본디 상인을 가리키는 말 중에 상역(商譯)이 있다. 글자만 놓고 본다면 상인과 역관(譯官)의 합성어처럼 보인다. 근대 이전에는 국경을 넘어 외국에 가서 무역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신 일행으로 참가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이 사행단을 따라 외국에 가는 기회를 틈타 무역에 끼어드는 일이 종종 발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도 부족한 여행 경비를 보충하기 위하여 제한적으로 역관들에게 무역을 허용하였다. 중국과의 무역은 우리나라에서 사신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교역을 하였기 때문에 여행 경비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기회를 역관들이 노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일본에서 사신들이 건너와 한반도 안에 설치된 왜관에서 무역할 때도 일본어 통역을 담당하는 왜학 역관(倭學譯官)이 필요하였지만, 중국 사행의 경우처럼 그들에게 여행 경비를 조달해야 하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대청 무역과 대일 무역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대외 무역에서 차지하는 역관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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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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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무역이든 대일 무역이든 역관에게는 부족한 급료를 보충해 준다는 의미로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다. 역관은 무역의 관리자인 동시에 기회가 주어지면 무역의 참가자로도 활약하였다. 일본어 통역 일을 하면서 왜관을 출입하는 동래 상인처럼 무역 상인과 역관을 겸하는 사람을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투잡족(two job族)’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정부를 대신하여 일본에서 군수 물자를 수입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밀무역을 일삼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축적한 자본을 재투자하여 거부(巨富)로 성장한 역관들도 있었다. 일본어 통역인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등 역관이 일본과의 무역에 관련이 깊었던 것은 일본과 무역하는 데 거래를 증명하는 명문(明文)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명문이란 전통 사회에서 토지나 물품 따위의 거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래 당사자 사이에 작성한 문서를 말한다. 조선과 일본은 무역을 한 뒤 그것을 증빙하기 위하여 명문을 작성하였다. 그 중 59점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각각이 낱장으로 되어 있어서 「대마도 종가 문서」 중에서도 고문서로 분류되어 있는 이 사료는 당시 일본과 무역에 참가한 동래 상인이나 역관의 존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기묘년(1699) 12월 15일에 작성된 명문을 보면 조선 측 무역 관계자 네 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두 명은 역관인데 훈도 박 동지와 별차 김 판사가 그들이다. 여기에서 동지(同知)와 판사(判事)는 훈도와 별차의 실제 이름이 아니라 각각 그들의 전·현직 관직을 가리킨다. 나머지 두 명은 윤 봉사와 이 직장으로 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봉사(奉事)와 직장(直長)이 실명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나 현재의 직책이나 경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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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에 등장하는 동래 상인
명문에 등장하는 동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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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상대방을 호칭할 때 실명 대신에 자호(字號)나 관직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예의이다. 예를 들면 성이 김씨인 전직 교장을 가리켜 ‘김 교장’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법이다. 또한 윤 봉사와 이 직장을 상인 행수(商人行首)라고 적은 것을 보면 이들이 왜관 출입 동래 상인 중에서도 대표자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업적인 상인이 등장하면서 역관과 상인은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역관과 상인은 본디 서로 보완 관계에 있었지만 때로는 무역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하는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래 상인을 이야기할 때 일본어 역관인 훈도와 별차가 전개한 무역 활동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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