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3권 거상, 전국 상권을 장악하다
  •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
  • 4. 동래 상인이 개성 상인과 다른 점
  • 동래 상인의 상업 활동
  • 왜관 개시는 3·8일장
정성일

일본에서 건너온 사신의 숙소로 쓰이는 객관이자 무역이 이루어지는 상관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던 곳이 왜관이었다. 따라서 일본과의 무역은 왜관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관에서 한 달에 세 번, 즉 매월 3이 들어가는 날짜(3·13·23일)에 무역이 이루어졌다. 이것을 가리켜 ‘장을 열다’, ‘장이 열리다’는 뜻으로 개시(開市)라 불렀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무역이 1609년(광해군 원년)에 재개되면서 개시의 횟수가 두 배로 늘었다. 매월 3과 8이 들어가는 날짜(3·8·13·18·23·28일)에 개시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10일 만에 개최되던 무역이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5일마다 열리게 된 것이다. 이는 무역의 규모가 전보다 크게 확대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144)이하 왜관 무역과 개시에 대해서는 정성일, 『조선 후기 대일 무역』 제2장 「조·일 무역과 개시」, 69∼107쪽 참조.

조선 측 자료인 『증정교린지』, 『통문관지』, 『춘관지』 등의 개시 관련 부분을 인용하여 당시 개시의 모습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145)『증정교린지』 권4 개시 ; 하우봉·홍성덕 옮김, 『국역 증정교린지』, 147∼148쪽.

매 삼순(三旬)의 3일과 8일에, 상고(商賈)들이 동래부에서 패(牌)를 받아, 물화를 가지고 (왜관의) 수문(守門)에 나아가면,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및 수세관(收稅官)과 개시 감관(開市監官)이 입회하여 조사하고 장부에 기록한 뒤 (상고들을 왜관으로) 들여보낸다. 훈도와 별차가 (왜관의) 개시 대청(開市大廳)에 들어가 앉으면, 여러 상인들이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절한 다음에, 각기 그 물건을 차례로 교역하여 마음껏 흥정하고 일시에 모두 물러난다. (왜관의) 각 방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은 잠상(潛商)으로 논하며, (상고들이) 왜화(倭貨)를 가지고 (왜관 밖으로) 나오면 또한 (수세관이) 장부에 적은 뒤 연말에 이르러 출입을 비교하여 호조(戶曹)에 보고한다.

그런데 왜관의 개시는 동래 주변의 5일장 체계와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왜관에서 조선어 통역으로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대마도의 오다 이쿠고로(小田幾五郞)가 지은 『초량화집(草梁話集)』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서 주목을 끈다.

3·8일 관시(館市)

4·9일 부산(釜山)

5·10일 수영(水營)

1·6일 물목포(勿牧浦) 강 입구

2·7일 동래(東萊)

여기서 매월 3과 8이 들어 있는 날에 열리는 관시(館市)가 왜관의 개시를 가리킴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수영은 좌수영장(左水營場)을, 동래는 읍내장(邑內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물목포는 독지장(禿旨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독지장(1·6일) → 읍내장(2·7일) → 왜관 개시(3·8일) → 부산장(4·9일) → 좌수영장(5·10일)으로 이어지는 동래부의 5일장 체계와 연계되는 교환 경제 속에서 왜관의 개시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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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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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일본에서 건너온 대마도 사람들이 왜관에서 생활하면서 남긴 기록 중에서 왜관의 관리 책임자인 관수(館守)의 일기가 있다. 이것을 가리켜 『관수매일기(館守每日記)』 또는 『관수일기(館守日記)』라고 부른다. 이 자료를 보면 개시일에 무역이 열렸다는 기록과 함께 조선의 역관이 왜관에 출입한 사실도 적혀 있다. 왜관에 들어간 조선의 역관들에게 일본 측이 제공한 식사 메뉴가 기록에 남아 있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거래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는 사례도 발견된다.

그런데 왜관에서 무역이 열려야 할 날짜인데도 개시가 없었다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상인의 물자 조달 상황이 좋지 않다거나 동래부의 사정 또는 비·구름 등 날씨 때문에 개시가 예정대로 개최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이럴 때에는 다른 날짜를 잡아 장을 열기도 하였는 데 이것을 가리켜 별시(別市)나 대시(代市)로 불렀다. 규정된 개시일 수에 비하여 실제 개시일 수를 비교한 개시율을 보면 1720∼1730년대에는 70%대였으나 1840년대 초반에는 그것이 20%대로 크게 떨어졌다. 이러한 개시율의 저하는 100년 사이에 왜관의 무역이 점차 정체되어 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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