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1. 서양 과학 기술과의 만남
  • 전기와의 만남
박진희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처음 전기가 도입된 때는 개항기였던 1884년쯤이다. 최초의 전기 소비자는 조선의 황실이었으며, 도입국은 미국이었 다. 황실의 전기 도입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미국이 조선 사절단을 맞아들인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 사절단(報聘使節團)’은 발전소와 전신국을 방문하면서 전기의 위력에 감탄해마지 않았고, 특히 에디슨(Edison, Thomas Alva)의 백열등이 발하는 밝은 빛에 매료되고 말았다. 밀초나 쇠기름의 희미한 촛불에 익숙해 있던 그들에게 백열등의 빛은 개화의 빛으로 보였던가 보다. 그들은 미국 방문 중에 에디슨 전기 회사로 찾아가 전기등에 대한 주문 상담까지 벌였고, 귀국 후에는 고종에게 자신들이 받은 강렬한 인상을 전달하였다. 외국 사신들과 서적을 통해 전기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던 고종은 이들의 귀국 보고를 받고는 바로 전등 설치를 허가하였다. 그리고 3개월 후 공식적으로 에디슨 사에 전등 설비 도입을 발주하였다.

갑신정변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던 이 전등 사업은 다시 속개되어, 마침내 1887년 3월 경복궁 내 건천궁에 처음으로 100촉짜리 전구 두 개가 점등될 수 있었다. 프레이자(Everett Frazar)가 총책임을 맡은 이 일은, 경복궁 전체에 750개의 16촉짜리 전등을 설치하고 이에 필요한 발전 설비를 갖추는 당시로서는 대형 사업이었다. 40마력의 전동기 한 대와 이 엔진에 연결할 25㎾ 직류 발전기가 발전 설비로 도입되었고, 경복궁 내에 있는 향원정의 물이 발전기를 돌리는 데 이용되었다. 당시 궁궐 사람들에게 공사 현장은 신기하기만 한 것이어서, 한 상궁은 이때의 경험을 기록으로까지 남겨두고 있다.

향원정의 취향교와 우물 사이의 중간 연못에 양식 건물이 세워지고 건물 안에는 여러 가지 기계가 설치되었다. 그 공사는 서양인이 감독하였다. 궁내의 큰 마루와 뜰에 등롱(燈籠) 같은 것이 설치되어 서양인이 기계를 움직이자 연못의 물을 빨아 올려 물이 끓는 소리와 우렛소리와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궁전 내의 가지 모양의 유리에 는 휘황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되어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밖의 궁궐에 있는 궁인들이 이 전등을 구경하기 위해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든 내전 안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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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설비를 갖춘 창덕궁
조명 설비를 갖춘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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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전등 점화에 성공하기는 하였지만, 전등 사업은 예상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설비 비용, 발전 시설 운전에 소요되는 석탄 등 연료 비용, 외국 기술자 초빙에 따른 비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전기 점등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사람들도 등장하였다. 게다가 점등된 전등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툭하면 고장이 나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일쑤거나 소음도 심해서 사람들은 당시 전등을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더군다나 경복궁에 설치된 발전 설비를 담당하던 유일한 전기 기사 맥케이(William McKay)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전기 점등이 몇 개월이나 지연되는 사태도 일어났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전등 사업은 계속되어, 1903년에는 경운궁에 자가 발전소가 설치되어 궁내에 약 900개의 에디슨의 백열등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 후 순종 황제의 거처가 된 창덕궁에는 45마력의 석유 발전기와 25㎾ 직류 발전기가 도입되어, 1908년 9 월부터 발전에 들어가기도 했다. 전등은 이렇게 항시적으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을 밝히는 조명 설비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궁궐에서만 볼 수 있던 전등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자 거리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서울의 전기 사업 경영권을 획득한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윅(H. R. Bostwick)이 운영하던 한미 합작 회사인 ‘한성 전기 회사’에 의해 가능했다. 자신들이 역점을 두었던 전차 사업이 사람들의 반발로 주춤해지자, 이들은 일본 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등 사업에 주력하였다.

당시 서울의 진고개에 상권을 이루고 있던 이들 상인들에게 판촉 활동을 벌인 끝에 한성 전기 회사는 1900년 5월 하순에 약 600개의 전구를 점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에는 전차 운행을 위해 동대문 발전소가 이미 설치되어 있는 상태여서, 이곳 전등을 밝히는 데에는 발전기를 증설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에 앞서 4월에 한성 전기 회사에서는 종로 네거리에 전등 세 개를 달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등 설치였다.

하지만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주는 전등의 밝은 빛은 사람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했다.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가설된 전선은 문명의 이기에 익숙지 못한 이들에게는 새로운 위험이었다. 1903년에 신문에 실렸던 다음과 같은 사건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사방이 미나리 밭으로 깔린 구용산 원효로 일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전기 회사에서 전기 공사를 하였는데, 마침 비 오는 날인 데다 전깃줄 두 군데가 끊어져 땅 위로 늘어졌다. 상투 틀고, 담뱃대 물고 지나가던 한 주민은 묘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긴 담뱃대로 톡톡 건드려 보니 손끝에 자글자글 느낌이 오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이때 지나가던 촌사람 하나가 나도 한번 해 보자 하고 맨손으로 전선줄을 건드렸다가 그만 손발이 새까맣게 타들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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