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1. 서양 과학 기술과의 만남
  • 전기와 함께 들어 온 전차
박진희

고종은 전기 못지않게 전차에도 관심이 많아서 1891년에는 알렌(Horace N. Allen) 미국 임시 대리 공사에게 직접 전철 부설과 운영에 대해 문의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당시 서구를 돌아보고 온 지식인들은 자신이 보았던 전차에 대한 소감을 전하며, 개화된 사회의 상징으로 전차 도입을 직간접으로 시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일찍 시작된 전차 도입 계획은 대한제국이 성립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선진 과학 기술 도입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듦으로써, 열강에 의해 흔들리는 국권을 지켜나가겠다는 취지에서 일어난 1897년의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의 탄생을 가져왔다. 대한제국은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산업 진흥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와 연관하여 전기 사업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이들 사업을 추진하면서 대한제국은 철도 부설권 등을 통해 이미 국내 이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청나라·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연합을 꾀하게 된다.

전기 사업에 대한 강력한 추진 의사를 갖고 있던 고종은 재정 고문이 교체되면서 10만 달러의 여유 자금이 생겼고, 이를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며, 수익률이 높으리라 생각한 전기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897년 11월 이후에는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을 자주 찾았는데, 이때마다 비용이 매우 많이 들고 또 번거로워 이 문제를 전차를 이용하여 해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이용하지 않을 때는 이 전차를 백성들이 이용하게 하여 수익을 올릴 수도 있으리라고 본 것이었다. 남대문에서 홍릉까지 전차 노선을 부설하는 공사비로 1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고종은 미국인 콜브란과 기술 지원에 대한 교섭을 하였고, 그에게서 긍정적인 답을 얻자, 전기 사업을 담당할 한미 합작 회사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하여 1898년 2월에 황실에서 40만 원과 35만 원을 출자하기로 하고, 이학균(李學均)과 콜브란·보스트윅 간의 계약으로 한성 전기 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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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전기 회사
한성 전기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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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의 첫 번째 사업은 예정한대로 전차 부설이었다. 이들은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그해 10월 1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2월 25일에는 서대문에서 종로 그리고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7.5㎞의 단선 궤도 및 가선 공사를 준공하였다. 1899년 5월 17일에는 전향식(轉向式) 개방차(開放車) 여덟 대와 황제의 어용 귀빈차 한 대로 성대한 전차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개통식에는 귀족·고관대작·각국 사신·관원·기타 민간 유력자가 초대되어 화려하게 장식된 여덟 대의 전차에 나누어 타는 시승이 있었다. 운집해 있던 사람들은 그 괴이함에 놀라는 한편 신기해하며 즐겼는데, 이로 인해 선로가 사람들로 메워져 전차가 여러 번 멈춰서야 했다고 한다.

이어 1899년 8월에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총 5리의 선로가 완성되고, 12월에 종로∼남대문, 남대문∼용산의 연장 선로가 완공되었다. 1900년 7월에는 남대문에서 의주로를 거쳐 서대문 밖에 이르는 선로가 개통되었다.

그런데 정작 전차가 운행되자 황실에서는 전차를 거의 이용하지 않았 다. 황실 전용 전차가 특별히 제작되긴 했지만, 황제가 평민의 것과 같은 모양의 차를 탈 수 없다는 전통으로 인해 황제는 전차를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달리 일반인들에게 전차는 개통 당시부터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하루 평균 승차 인원이 2170명으로 한성부민의 1%에 달할 정도였다. 호기심 어린 사람들은 전차를 타고자 생업을 쉬기도 하고, 멀리 시골에서 전차를 타러 올라오기도 했다. 한번 전차에 타서는 내리기가 싫어서 서대문·청량리를 몇 번이나 오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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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서울의 전차
1903년 서울의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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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차가 처음부터 문명의 이기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개통 즈음에 가뭄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전차가 땅의 습기를 모두 빨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믿기도 했다. 용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끊고 동대문 발전소를 세웠기 때문이고, 전깃줄이 비를 오지 않게 한다고도 믿었다. 그리고 개통 일 주일 만에 어린이가 치여 죽는 사고가 일어나자 전차에 대한 원망이 더 높아졌다. 게다가 죽은 아이의 시신을 일본인 운전사 가 내버려둔 채 도망쳐버리자 민족적인 감정까지 더해져서 전차 두 대를 태워버리는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그 후로도 한성 전기 회사 노동자들에 대한 채무 문제가 발생하면서, 서울 사람들은 전차 승차 거부 운동을 단행하기도 했다. 한편, 전차로 인해 생계에 타격을 입은 인력거꾼들은 조직적으로 전차 운행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결국 개통된 지 4∼5년이 지나도록 전차는 대중교통 수단이라기보다는 처음에는 오락거리로, 한편으로는 생업을 앗아가고 민족적 자긍심을 짓밟는 것으로까지 해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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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앞 전찻길
남대문 앞 전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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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일반 대중교통 수단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이다. 1916년에 시내를 다니는 전차 대 수는 93대였는데, 1927년에는 126대에 이르고 있다. 승차 거부 등으로 한성 전기 회사는 거의 이익을 내지 못했지만, 일본의 와사 전기 회사(瓦斯電氣會社)가 1921년 전차 사업으로 벌어들인 이익은 36만 3521원에 달하고 있다. 1931년의 전차 노선은 경용선·종로선·황금정·광화문·서대문·창경원·종로 북부선·용산역· 장충단·원정·마포·청량리·왕십리 선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노선을 자세히 보면, 대개가 당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던 지역들을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전차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편익을 위해 우선적으로 신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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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남대문로
1920년대의 남대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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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수단으로서의 전차 출현으로 사람들의 행동 양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차의 탈선·충돌 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우마차나 인력거 시대보다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만 했고, 양반처럼 느긋하게 걷는 팔자걸음으로는 전차 궤도가 깔린 시내를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전차의 소음 또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흔들어 깨울 만 큼 시끄러웠다.

전차는 옛 서울의 경관도 바꾸어 놓았다.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던 옛 도시의 모습은 전차의 등장과 함께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었다. 전차 노선은 성곽을 불필요하게 만들어버렸고, 거주 구역을 성 외곽으로 확장시켜 놓았다. 전차의 빠른 이동 속도로 인해 성곽 안에 집을 구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정부에서도 늘어가는 서울의 인구를 확산시키기 위해 전차 종점 지역 주위로 집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넓어진 서울은 이제 소나 말로 유람하기 힘들어졌다. 이제 소나 말 대신에 전차가 이들의 발 구실을 하게 되었다. 공간의 확장만큼이나 전차는 철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예절을 요구하였다. 전차의 승객들은 이제 여자에게,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였다. 전차표를 지닌 승객들은 전차 안에서만큼은 반상의 구별이 사라져버렸다. 상대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예절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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