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1. 서양 과학 기술과의 만남
  • 전기 통신의 도입
박진희

우리나라 전기 통신의 역사는 1876년(고종 13) 2월에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신문명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은 1883년 1월에 덴마크 북부 전신 회사의 청원으로 ‘부산 구설 해저 전선 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맺으면서 처음으로 전기 통신 시대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의 전기 통신의 역사는 인천과 서울 사이에 전신 시설이 완공되고 이를 관할하는 한성 전보 총국(漢城電報總局)이 개국된 1885년 8월에 개막되었다.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 청나라가 1885년 6월에 의주 전선 합동(義州電線合同)을 맺고, 서울과 인천 사이 전신 설비 가설에 경비와 물자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1000여 리의 전신선이 완공되어, 이를 서로 전신선(西路電信線)이라고 불렀다. 이 서로 전 신선은 처음부터 청나라에서 발안하여 그들의 필요에 의하여 그들의 자금과 기술로 가설하였으며, 그 업무에 있어서도 한문 전보를 위주로 하고 한글 전보의 정식 전신 부호는 제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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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보국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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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전신선의 건설 이후 대한제국은 서울과 부산 사이의 전신선을 자주적으로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1887년 3월 13일에 한성 전보 총국과는 별도 기구인 조선 전보 총국을 창설하여, 전신 분야에서 자주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전신망은 남로 전신선(南路電信線)이라 불렸는데, 남로 전신선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공사가 늦어져 1888년 6월에야 개통을 볼 수 있었다.

이 전신선의 건설을 계기로 최초의 전신 규정인 전보 장정이 제정되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습용되는 국문 전신 부호가 마련될 수 있었다. 남로 전 신선이 가설된 지 3년 후인 1891년 6월에 한성에서 원산에 이르는 북로 전신선(北路電信線)이 개설되었다. 이 전선 가설 계획은 당시 청나라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친러 정책이라는 정치적 배경 아래 세워졌고 계획상으로는 두만강에서 러시아의 전신선과 연접되는 것이었지만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하고 서울과 원산 사이만 완성되었다. 가설과 관할을 조선 전보 총국에서 독자적으로 수행하였다.

초기 전신 설비 가설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전선을 연결해 줄 전봇대의 확보 등 부대설비를 갖추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데다가 전신 시설의 보호와 관리에도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신 시설 관리를 위해 순변(巡弁)·순병(巡兵)을 두어야만 하였다. 길가에 전봇대가 등장하자 호기심에서 사람들이 이를 그냥 보고 지나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선이 되는 경우도 많아 초기 전신 설비는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전선을 따라서 100리에 순변 한 명, 10리에 순병 한 명꼴로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간단한 기술도 익혀 단선 정도의 사고는 직접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신 사고가 빈번해지자 기술자인 공두(工頭)가 순변·순병의 업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초기의 순변·순병 제도는 폐지되었다.

전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신 설비가 일반인들에게 문명의 이기로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독립신문』에 실렸던 것처럼 서울에 있는 통신국에서 의주까지의 1000리 사이에 말을 통하게 한다는 전신의 마력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초기 전신을 이용한 이들은 주로 조선에 체류하고 있던 외국인들이었다. 일반 서민들에게 전신은 오히려 불편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논과 밭을 가로질러 함부로 설치된 전봇대와 전깃줄은 성가신 것이었고 전봇대로 쓰일 나무의 공출과 이를 세우기 위한 부역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신 사업이 대한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전신은 서서히 민족 전체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변화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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