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
  • 1. 서양 과학 기술과의 만남
  • 전화의 보급
  • 항일의 대상이 되어 버린 전신 기술
박진희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 내에서의 자국 패권을 공고히 하였고, 이는 일본에 의한 전신 전화 사업의 유린에서도 잘 나타났 다. 1905년 4월,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한일 통신 협정’을 체결, 우편·전신·전화 사업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리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협정으로 대한제국은 국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통신 기관을 빼앗겼다.

통신 협정에 항거하는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같은 해 7월 2일, 강계 우체사를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의 전신 전화 사무는 모두 일본 관할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 일본은 우리의 통신 기관과 그 이전부터 일본 체신성에서 직할하던 통신 기관 및 육해군에서 관장하던 것을 모두 합쳐 새로 생긴 통감부 통신국에서 관장하게 함으로써 이 땅의 통신 사업을 명실 공히 일원화하였다. 일본은 이렇게 통신 기관을 장악하게 되어 대한제국 침탈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게 되었다.

1907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4년 동안 일본 자체적으로 통신 시설에 투자하기로 한 협정을 어기고 그들은 대한제국 정부에게 경비 전화 가설비 등의 명목으로 53만여 원의 예산 집행을 강요하였다. 이 예산은 의병 항쟁이 활발한 지역에 경비 전화를 가설하는 데 쓰였고, 이는 일본의 주권 침략에 맞서 싸우는 애국지사들에 대한 강력한 탄압 수단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1910년 ‘한일 병합(韓日倂合)’에 이르는 기간까지 전기 통신 사업은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이 전개한 항일 운동의 주공격 목표가 되었다는 점은 전기 통신 사업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하다. 무장 항일 의병 투쟁이 극심했던 1907년의 기록만 보더라도 전기 통신망이 입은 피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의병들은 주로 청사를 습격하여 방화·파괴하고 공금 및 관물의 탈취와 우편 체송을 방해하였으며, 전선을 단절하였다. 당시 의병 활동으로 살해된 통신관서 소속 직원은 일본인 15명, 조선인이 다섯 명이었으며, 부상자는 일본인이 13명, 조선인이 12명이었고 일본인 가족들로서 사망자가 다섯 명, 부상자가 두 명이었다. 전기 통신의 피해는 통신 두절을 꾀한 전주 파괴가 1296개, 전선의 단절이 22리 34정 17간으로 연장 51리 34정 31간이 불통이었으며, 이로 인한 각선의 불통 기간을 합하 면 319일 17시간 42분으로 피해액은 2만 2634원에 달하였다.

의병을 비롯한 당시의 민족 지도자들이 심지어 미신적 방법까지 구사하면서 일제가 주도한 통신 사업과 우편 사업을 적극 방해했던 이유는 항일 투쟁의 전략적인 측면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들은 근대 문명의 이기라는 그 자체의 가치를 물리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일제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던 전기 통신 시설을 배격했던 것이다. 일제가 강점한 전신 시설은 의병들에게는 자신들의 항쟁을 탄압하는, 폭압적인 기술 설비였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의 모든 전기 통신 사업은 총독부 산하로 귀속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1기라고 볼 수 있는 헌병 통치기에는 항일 투쟁이 활발했는데, 전기 통신 사업은 이 항일 투쟁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당초부터 조선 총독부가 경영하는 전기 통신 사업은 이런 항일 억제 정책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일 병합 초기에는 상당한 사업 수지 흑자를 보았지만 경비 통신망의 확장 강화를 비롯한 군수 통신 시설과 일본과 만주로 통하는 통신망의 강화에 치중한 나머지, 공중 통신에 기여한 바는 극히 미약했다.

일제는 완전히 엄폐적인 기능을 지닌 수탈의 수단으로 전기 통신 사업을 진행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중반에 들어선 1916년에는 공중 통신 시설에 대한 투자마저 중단하고 만다. 이는 당시 통신 이용이 두 배로 상승하고 있던 상황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1922년에는 전신 전화 확장 5개년 계획을 수립하기는 하지만, 일본 정부의 재정 긴축과 항일 투쟁 억제 방향의 정책으로 이 계획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에 이르러서야 제2차 확장 계획이 세워지고, 1937년에 제3차 확장 계획이 수립·실시되는데, 이는 한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 본토와 만주 등 중국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통신망의 확충뿐만 아니라 항공기 및 선박과의 통신을 위한 설비 확충에도 주력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어 공중 통신의 부족 현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1931년 조작한 만주 사변을 시발로 만주와 대륙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우리나라의 통신망 경영의 중점을 일본 본토와 대륙을 연결하는 가교적 역할에 놓고 있었다. 때문에 이 땅에서는 자동 전화가 수도 서울이 아니라 함경북도 나진항에서 1935년 3월에 제일 먼저 개통되었고, 부산에서 압록강과 원산에 이르는 통신용 케이블이 우선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식민 정책에 철저했던 일본은 필요한 장소와 경우에만 제한된 시설을 갖추었고 목적에 따라 제도를 개선하였으며, 기술 및 관리 부문에 있어서는 조선인을 거의 양성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은 그 후 우리나라 전기 통신 사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군사는 물론 정치·사회·경제·문화 등의 제도가 전시 체제로 개편되고, 소위 국민 총동원령의 제약을 받게 되자 전기 통신 사업도 방위 통신 체제로 개편되어 일제가 공언한 대로 ‘국방의 제2군’ 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한글 전보의 사용 정지, 가입 전화의 공출, 전보 특수 취급의 제한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제한 조치들이 시행되어, 우리나라 전기 통신 사업사상 가장 참담한 암흑기가 되고 말았다. 식민지 시기 전신·통신 사업이 남겨 준 유산의 청산은 1960년대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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